동짓달의 산사는 을씨년스러웠다. 산속 고찰의 대웅전답게 틀어진 문틈으로 칼바람이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냈다. 가족들은 얼음 장 보다 더 차디찬 법당 나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외투를 걸치지 않은 남동생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다.
스님의 영가 법문에 맞추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49재의 막재를 올리는 자리라 동네 어른들 몇몇 분도 함께 자리해서 아버지의 생전을 기억하며 극락왕생을 빌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 아버지 영정 앞에 가서 어물쩍거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사진 앞이 아니라 그 옆에 사진 없는 위패 앞에서 두 손을 비비고 계셨다.
“언니야, 엄마가 밥 먹으러 오래.”
지금도 귓전을 맴도는 그 목소리, 내가 알고 있는 동생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땅거미 지는 저녁나절 엄마 심부름으로 친구 집에서 소꿉놀이에 열중인 나를 찾아와선 차마 그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사립문에 기대어 나를 부르던 나지막하고 또랑또랑한 그 목소리를….
그 애는 4살 때 홍역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엄마 말에 의하면 몇 날 며칠을 불덩이 같은 몸으로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데도 동네 점방에서 파는 사이다 한 병을 약인 양 먹이고 달래며 이불만 덮었다 걷었다 하며 애를 태웠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날 밤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동생을 업고 20리가 넘는 면 소재지 보건소를 향했다고 한다. 농한기에는 산판 일에 매달려 살았던 아버지는 집에 오지 않은 지 며칠 되었고 엄마 혼자 불덩이 같은 아이를 업고 인적 없는 산길을 온몸에 땀이 배도록 뛰어갔지만, 그날따라 보건소에 의사는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축 늘어진 몸뚱이로 엄마 등에 매달려 있던 동생이 들리듯 말듯이 한 마지막 말은 물을 달란 소리였다.
“엄마, 물 ~”
“그래 조금만 참아 외갓집에 가서 먹자.”
엄마는 힘이 다 빠져버린 다리를 끌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면 소재지에서 우리 집 오는 중간지점에 외갓집이 있었다. 엄마가 외갓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녘이었는데 땀으로 범벅이 된 엄마 몸과는 반대로 동생의 몸은 싸늘히 식어 있었다. 내 동생 남숙이는 아무도 눈뜨지 않은 이른 아침에 그렇게 돌무덤 속으로 사라졌다. 동생을 외갓집 동네 동산에 묻을 때 엄마의 가슴속에는 커다란 혹 하나가 생겼다.
그 혹은 언제나 엄마를 짓누르는 돌덩이였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좋은 옷을 보아도 명일命日조차도 챙겨줄 수 없는 돌무덤 속의 어린 딸에 대해 애절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자주 아프고 동생 꿈을 꾸며 밤잠을 설치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훗날 내가 어른이 되고 난 후 엄마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혹에서 조그만 조각 하나를 떼어내듯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때 ‘엄마 물~ ’하던 소리가 너무도 가슴 아프다고, 아이를 내려서 빈 젖꼭지라도 빨게 할 것을,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나에게 떼어준 혹의 조각들이 많아도 엄마 가슴속에 있는 그 커다란 혹 덩이는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49재를 절에 올리면서 천도 잘하는 노老스님한테 엄마는 말했을 것이다. 오십 년 가까이 엄마 가슴속에 자리한 애달픈 딸 이야기를, 그래서 아버지 위패 옆에 동생 위패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 제사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살아계실 때 오랜 세월 병간호 하신 걸로 당신 일 다 하셨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픈 딸, 병원 한 번 제대로 못 데려가고, 저승 가는 길에 목말라하던 어린 딸에게 물 한 모금, 젖 한 모금 주지 못했던 미어지는 가슴을 쓰리쓰리 풀어내며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다. 푸르스레 얼어있는 두 손 맞붙여서 비비고 또 비비고 뻣뻣이 굳은 두 다리를 방석조차 깔지 않은 법당 마루에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는 기도다. 간절한 마음에 아마 살을 에는 추위쯤은 느끼지도 못하리라. 모든 재의식이 끝나고 이승에 남아 있던 잔재들을 불태워버리는 마지막 의식에서 나는 아버지의 영혼도 내 동생의 영혼도 아픔 없는 세계에서 편안하길 바랐다. 엄마의 그 커다란 혹도 이제 툭 튀어나와 그 불 속으로 들어가 다 타버리길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아버지 가시고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치매 걸린 사람처럼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가끔 동생 이야기를 뱉어낸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살아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