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마지막 주 남편이 철 지난 휴가를 받았다.
이 귀한 시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남편과 나의 고향인 양산을 다녀오기로 했다. 우린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부모형제와 친지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오색 빛 가을이 발목을 잡았다.
쉬었다 가라. 놀다 가라. 한없이 유혹했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다가 언젠가 인터넷에서 읽은 윤필암이 떠올랐다. 신라 시대 의상대사의 동생인 윤필이 머물렀다 하여 이름 붙여진 암자로 가을 경치가 절경이라던 기억이 났다. 윤필암은 경상북도 문경시 사불산 자락에 있는 대승사의 부속 암자다. 고려 시대 지어졌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은 비구니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다는 정보도 인터넷을 뒤지다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에 길을 물어서 문경 시내를 지나고 시골 들판을 지났다. 두 팔 벌려 안아보고 싶은 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 나무들과 풀꽃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산길도 달렸다.
윤필암에 도착했을 땐 서산 마루턱에 걸린 석양이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들어있었다. 암자에 들어서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는 듯이 살며시 내다보는 비구니 스님이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님, 하룻밤 묵어갈 수 없겠습니까?”
“여긴 참선하는 곳이라 불가능합니다.”
하며 두 손 합장하며 돌아선다. 가끔 사찰을 찾는 내가 가진 짧은 지식은 웬만한 절에선 하룻밤 묵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비구니스님만 계시는 곳에 예약도 없이 남편과 함께 찾아간 나의 무지함을 뉘우치며 한 고개 너머 대승사로 발길을 돌렸다.
이미 해는 지고 땅거미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산속은 이내 캄캄한 밤이 되었다. 초행인 우리는 불안한 맘으로 조심스레 깊은 산속으로 핸들을 돌렸다. 멀리서 희망처럼 불빛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바라본 대승사는 생각보다 큰 고찰이었다. 종무소에 가서 하룻밤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고 얼마나 기쁘던지, 부처님 전에 참배하며 다시 한번 감사드렸다. 늦은 저녁을 얻어먹고 따듯한 온돌방에서 만사를 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서 보니 대승사의 전각들은 옛것은 옛것대로 새것은 새것대로 저마다 기품과 웅장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특히나 오래되고 불탄 흔적이 있는 전각에 양각으로 새겨진 연꽃무늬는 꽃잎 한 장 한 장이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던지 잠시 나의 혼을 빼앗아 갔다.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과 아름드리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갈아입은 가을옷은 자연이 아니면 아무도 해내지 못할 아름다움과 신비 그 자체였다. 찰칵! 기념사진을 찍어 추억을 기록하고 다시 윤필암으로 향했다
.
전날 해 질 녘에 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단풍들이 아침 햇살을 머금고 살랑살랑 손 흔들며 우리에게 인사한다. 낙엽 쌓인 숲길에서 멋진 밤색 줄무늬와 제 몸집만 한 탐스러운 꼬리를 가진 다람쥐 한 마리가 길 안내를 하듯이 쪼르륵 바위틈을 지나 앞질러간다.
암자는 높고 웅장한 사불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일주문 대신 쪽대로 엮은 작은 사립문이 바깥세계를 단절하듯이 나직이 달려있고 마당에는 널어놓은 붉은 고추가 햇볕을 받고 더 붉어지고 있었다. 아담하고 예쁜 연못과 가을 풀꽃들이 다소곳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정원이 무심히 우리를 반겼다.
윤 필 암의 사불전四佛殿에는 불상이 없고 정면에 설치된 유리창을 통해 산 정상에 있는 석불을 향해 참배하게 되어 있었다. 석불은 네 면 모두 부처가 새겨져 있어 사불석이라 부르며 그런 연유로 사불암 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우리는 사불전에 참배하고 전각 뒤편 산 언덕에 있는 삼층 석탑을 돌며 잠시 고개 숙여 합장하고 암자를 떠나왔다. 온 듯 안온 듯, 본 듯 안 본 듯 전각도 비구니스님도 가을 단풍과 함께 모두가 하나의 자연이었다.
암자에서 한참을 내려오자 길 양쪽으로 사과 과수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올라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커다랗고 탐스러운 사과들이 초록색 잎사귀 사이로 얼굴을 붉히며 손만 내밀면 닿을 거리에 가지가 휘어지게 매달려 있다.
마침 과수원 옆길에서 농장주 부부가 사과를 따서 선별하고 있었다. 사과쟁이 남편이 그냥 갈 리가 없다. 덤으로 사과 상자 위까지 올라오게 담아준 농부의 마음과 가을을 한가득 싣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 부부는 괜히 히죽히죽 웃었다.
때로는 휴식이 삶을 이렇게 풍요롭게 한다는 걸 느끼며 이 가을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