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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과 그 마음

by 박정옥

그 마음과 그 마음


창밖의 나뭇잎이 바람을 껴안고 한바탕 춤추는 것을 바라본 늦은 오후였다. 작년 8월에 해외 근무를 하느라 떠났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우리가 유월 말에 한국 들어가요.”

세젤예* 손주를 드디어 만날 수 있다는 반가움에 심장이 뛰었다. 팔월 초순에나 오리라 생각했는데 유월 말이면 열흘도 안 남았다. 엄마가 준비해 놓을 것이 있냐고 물었지만, 아무것도 없다며 가만히 있으란다. 내가 힘들까 싶어 하는 소리인데 서운함이 스며드는 건 무슨 심사인지 모르겠다. “힘든데 하지 마세요. 안 해줘도 괜찮아요.” 이런 말보다 “그것 좀 해주세요.” “힘들었죠?” 하는 말을 들을 때 더 힘이 나는 엄마란 걸 딸은 모른다.

딸 집은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있다. 비워놓고 간 집이라 틈틈이 들여다보았고 한 번씩 청소도 했다. 그래도 아이들이 오기 전에 대청소할 생각이었다. 남한테 맡기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쉬엄쉬엄 조금씩 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빠졌다. 머릿속에선 날짜별로 할 일들이 메모장에 적어둔 것처럼 떠오른다.

다음 날 딸 집으로 갔다. 방마다 걸린 커튼을 걷어내고 창틀을 대강 닦았다. 커튼 세탁을 하고 나서 욕실용 수건을 모두 꺼내서 ‘삶음’ 기능으로 한번 돌려서 바짝 말렸다.

작은방 문을 열어보니 손주가 보던 책과 학용품, 컴퓨터 등이 싱글벙글 웃는 듯하다. ‘그래, 너희도 승구리가(애칭) 보고 싶었지.’ 하면서 책장을 정리하고 책상까지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등줄기에 땀이 났지만 그래도 손주가 오면 공부할 방이라 생각하니 좋았다.

다음 날은 청소 전에 노래를 틀어놓고 에너지를 끌어올렸다. 주방의 집기들을 세척하고 세라믹 식탁도 팔목이 아프도록 문질렀다. 작년에 딸이 떠난 후 분해해서 청소해 둔 냉장고도 살펴봤다. 그때 청소를 한답시고 고정 선반을 잡아당겨서 고장 내고 그냥 둔 냉장고다. 마침, 기사가 와서 수리해 주었다. 그사이 세균이 번식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소독제 섞인 물티슈로 냉장고 안을 다시 닦고 마른행주로 한 번 더 마무리했다.

바닥에 허옇게 던져둔 물티슈를 보니 몇 년 전 딸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물티슈에 미세플라스틱이 섞여 있어서 우리는 안 쓰기로 했어요.”

딸이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주워서 쓰레기 봉지에 담고는 중얼거렸다. “이 편리한 것을, 저들이 먹는 배달 음식 포장 상자에 비하면 ….”

다음 날도 출근하듯이 딸네로 향했다. 젊었으면 하루에 다 할 것 같은 일을 며칠 동안 해야 했다. 청소기가 “우엥 우웽”소리 지르며 먼지를 빨아먹고 난 후 물걸레 청소기 두 대를 거실 바닥에 풀어놓았다. 이것들은 큰 소리 내지 않고 춤을 추듯이 스르륵스르륵 방과 거실을 오가면서 바닥을 닦아준다. 가전제품의 위대함이여! 누가 발명했는지 박수를 보낸다. 청소기가 바닥을 닦는 동안 나는 반짝반짝 빛나게 욕실 청소를 했다.

그러고도 며칠을 더 가서 침대 시트와 이불 빨래도 하고 베란다도 정리했다. 청소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했다. 딸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고됨보다 보람이 큰 며칠이었다. 저녁엔 어깨와 손목에 동전 파스를 붙이고 잤다.


“내일 오후에 도착해요. 모레 엄마 뵈러 갈게요. 걱정하지 말고 주무세요.”

서울 도착 하루 전에 온 카톡 메시지다. 마중 같은 건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란 뜻이다. 긴 비행기 탑승으로 피곤할 테고 시차도 있으니 보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것쯤 나도 안다. 그러나 격하게 빨리 보고 싶다.

작년에 손주 가는 모습이 보고 싶어 굳이 공항까지 가겠다고 했다. 그때 딸이 나를 말리면서 하던 말이 생각나서 마중은 갈 수가 없다.

“엄마, 시부모님이 공항에 오시면 죄송하고 불편할 것 같아요. 엄마가 배웅 오면 승구리 아빠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겠어요?” 6개의 캐리어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공항에서의 혼잡함을 그때야 생각한 나는 그 말에 입도 다리도 떼지 못했었다.

딸이 온다는 날 시장을 두 번 다녀왔다. 집에 오면 시원한 물은 있어야지, 오래된 정수기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 손주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도 종류별로 냉동실에 한가득 사다 넣었다. 딸이 좋아하는 얼음도 얼렸다. 한우와 메추리알로 손주 입맛에 맞는 장조림도 하고 딸을 위해 꽈리고추 멸치볶음도 만들어서 밑반찬을 준비했다. 햇반과 컵라면도 사고 유제품과 과일도 샀다. 그래도 작년에 비우고 간 냉장고는 텅텅 비어 보인다. 그렇다고 내 취향대로 더 사다 놓을 수도 없었다.

밤새 깊은 잠을 못 자고 뒤척였다.


손주가 새벽부터 할머니 보러 가자고 난리라면서 아침 6시에 카톡이 왔다. 평소 같으면 딸과 손주가 일어날 시간이 아니다. 손주 핑계 삼은 딸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딩동” 그들이다. 옷을 단정히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딸과 훌쩍 자란 손주가 방긋 웃고 있다. 난 손주를 끌어안고 볼을 비비며 잘 다녀왔느냐고 묻고 손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한테 뽀뽀.”

내 말에 손주는 망설임 없이 내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손주 등 뒤에 있던 딸이 “그렇게 좋아요? 엄마 눈에서 꿀 떨어지겠다.” 라며 웃는다. 딸은 양손 가득 들고 온 선물을 내밀며 손주가 고른 선물도 있다고 했다. 한참을 놀다 돌아가면서 “엄마가 청소하고 먹거리 사다 놓았죠. 감사해요.” 하고 툭 던진다.

딸은 복직할 때까지 수시로 내 곁에 와서 놀았다. “엄마, 여기 가볼까?” “여긴 어때요?”라며 인터넷을 뒤져가며 맛집이나 명소를 찾아 함께 가자고 했다.

딸은 내가 미처 몰랐던 그녀의 살가운 마음을 내 마음에 갖다 붙였다.

*세젤예- 세상에서 제일 예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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