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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쥐꼬리 May 01. 2024

남자친구가 내 발작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이 지긋지긋한 학력경력 콤플렉스


작년 12월, 나는 그 힘들다는 키친핸드 잡에

겁도 없이 도전해서 한창 일을 하고 있었다.


하루 6시간, 주 5일.

한국에서 일하던 근무 시간보다는 적었으나

한시도 쉬지 않고 무거운 식기를 나르고 뜨거운 물을 맞아가며 설거지하다보니 업무 강도는 훨씬 고되고 힘들었다.


그때는 호주에 온 지도 벌써 두 달 차라, 몸이 힘들어도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서 '괜찮아, 적응될 거야' 버릇처럼 스스로에게 말하고 생각했지만 나뭇가지처럼 연약한 내 손가락과 손목이 버텨주질 못했고 한국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일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보상심리까지 발동해서 결국 난 3주 만에 그만 두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고 말았다.


키친핸드의 단짝친구, 고무장갑


그만 두고 나니, 몸은 편해졌지만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당장 내가 책임져야하는 내 몸뚱이와 나에게 드는 비용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들었던 생각은 '토막경력이 또 하나 늘었군.'이었다. 짧게는 3주, 길게는 1~2년 '토막 경력'뿐인 나는 4~5년 동안 한 우물만 파서 어엿한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멋져보인다. 예를 들면 어릴 적부터 국어에 관심이 많아 중고등학교도 문과를 나와서 학부와 대학원까지 국문학과를 전공으로 졸업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내가 갈망하고 동경하는 '순혈'이다.


그에 비해 나는... 잡종?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간 화장품 브랜드에서 인턴을 그만둘 때,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된 공무원을 그만둘 때는 분명 너무 힘들고 미래에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일이 지금의 나에게 과도하게 큰 스트레스를 주니까 그만뒀다고 생각했는데, 호주에 와서도 짧게 일하고 그만둬야겠다는, 이런 비슷한 일이 발생하니까 나 스스로에게 점점 의문이 든다.


나, 정말 힘들어서 그만둔거 맞나?

정말 나중을 생각했을 때, 길게 생각했을 때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어서 그만둔게 맞나?


키친핸드를 그만 두고 다른 일을 구하며 불안에 떨고 있을 때였다. 그때 불안했던 마음을 식히고자 남자친구 요한이와 그동안 내가 공부했던 전공, 해왔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한이가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공부한 게 되게 많네, 그럼 대학교를 세 군데 나온거야?'


의문을 느낄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알고 있는 내 전공은 공학, 미용화장품학, 그리고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한국어 교육까지 3개나 되기 때문이다. 변덕도, 불안도 심한 나는 학부생때부터 무언가 하나를 뚝심있게, 끈덕지게 해내지 못하고 학점은행제와 편입을 하다가 이렇게 어딜가도 설명을 해줘야하는 학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나의 '토막학력'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서 매번 설명을 하고 납득을 시켜줘야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부담을 느낀 나는 내 학력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꺼려하게 됐다. 그렇게 학력에 대해 질문을 받는 것은 내 '발작버튼'이 되었다.


그런 나에 비해 요한이는 한 우물만 판,  서른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자기 분야에 있어서 중견급이 되었다. 내 기준으로 그는 이미 '순혈'이었다. 그런 그에게 뭐든 대충 해보고 맘에 안들면 금방 그만 둬버리는 내 콤플렉스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그만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하나의 전공만 판 사람은 내 눈에 이렇게 보인다.

내가 눈물을 보이자 당황하며 나를 달래는 그에게 내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는 좀 다른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의아해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참 대단한 것 같아. 니가 하고싶은게 뭔지 잘 알고 도전정신이 있잖아. 내 12년 경력?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편해서 하는거야. 내가 하고싶은게 뭔지도 모르겠고 겁이 많아서 도전도 못하겠어. 그래서 나는 네가 참 대단해보이고 부러워.'


충격이었다. 내 토막경력, 토막학력이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끈기가 없어보이는게 아니라 도전정신이 투철해보이는구나. 요한이의 그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호주는 나에게 키자니아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려고 온 워킹홀리데이. 여전히 토막경력만 차곡차곡 모으고 있지만 이제는 설령 토막경력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가치있는 스토리라고 시각이 바뀌었다.


토막경력이더라도 그 경험이 나를 만든다. 이자카야 웨이트리스, 바리스타, 포크리프트 드라이버...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호주 워킹홀리데이, 경험치를 채우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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