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의 성격 상담소
<아들러의 성격 상담소>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연달아 읽던 나는 조금의 불편함을 느꼈다. 이어령 선생님의 이야기가 잘게 씹어서 죽처럼 만든 음식이라면, 아들러의 이야기는 늘 딱딱한 사탕처럼 느껴졌다. 직설적이고 단언적인 아들러의 태도는 '내 머리로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만들었다.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꼭꼭 씹어 삼켜 야했다.
<미움받을 용기>를 처음 읽을 때도 그랬다. 아들러의 목적론적 심리학은 신선하면서도 직설적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포장지를 갈기갈기 뜯어서 마주하게 하는 듯하다. 예를 들면, 스스로 고독에 몰아넣은 것도 내가 고독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했다. 어울리지 않으려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실제 사실이건 아니건을 떠나서 생각해볼 만한 주제였다.
인간관계라는 문제에 있어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남을 사람은 남는다'라는 수동적인 내 태도를 돌이켜본다. 여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교의 영향이 큰 내 기질을 생각했을 때 더욱 그렇다. 다만 이러한 회피적이고 동시에 방어적인 태도는 내가 사람들에게 적의를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상처받고 비판받는 게 두려웠던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잘 상처받는 타입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비판이 피곤하다. 내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을 머릿속으로 필터링해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내 생각을 유하게 표현하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밉다. 다소 불편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렇기에 회피했다. 내 편안함을 목적으로 회피한다면 아들러의 관점은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편안한 사람과는 필터링 없이 내 생각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편안한 사람이 아니고 모르는 사람과도 그렇다. 설령 비판받는다 할지라도 즐겁다. 나는 과연 사람들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인가? 생각한다. 단언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전개되는 책을 읽고 있자니 하나하나 씹어 삼키기가 쉽지가 않다. 내가 감추고 싶었던 어떤 정곡을 찔린 것일지도 모른다.
내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을 중시했던 이어령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설령 3대 심리학의 거장 아들러의 철학이라도 내 머리로 씹어서 삼켜야 한다. 때로는 수용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읽어 나갔다. 한 페이지에서 수십 분을 머무르기도 한다. 지난 <미움받을 용기>에서 쓰인 거처럼 인터뷰의 형식이 아니어서 그럴까. 단언적인 내용들은 머릿속 생각들을 온통 흩트러 카오스 상태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다시 창조적인 생각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질서 정연한 것은 창의적이지 않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아직 잘 씹어 삼켜지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최소한의 고립을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랜 친구들과 술을 나누는 것보다 책과 이야기하는 게 더 좋은 걸 어떡하겠나 싶다. 이 책에서는 이해받지 못할게 분명하다. 나를 도망치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난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간관계에 갈등이 없다. 대인관계를 즐기지 않지만 그에 문제 또한 없다. 더더욱 곱씹어 생각해본다.
반면에 어린아이에게 칭찬도 비난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수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이 우위 관계를 만드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을 넘어서 선악의 판단, 행동론을 내가 어린아이에게 결정지어줄 수 있을까. 나는 과연 그에게 판사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도 부처님도 아니다. 내가 선악을 결정지어서 반찬으로 놓아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어머니가 생선을 씹어서 반찬으로 놓아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겸허한 태도가 수시로 마음속에서 솟구친다
질문하는 이 없이 스스로 질문을 거듭하다 보니 쉽게 쓰인 이 책이 여전히 딱딱한 사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