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떡잎부터 남달랐던 공포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겠네요?라는 질문에 굳이 답하자면 그런 편이다.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거나 무모한 도전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충동은 늘 로망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수영은 곧잘 하는 편이다. 자유형 정도는. 어릴 때만 해도 집 근처에 꽤 큰 어린이 수영장에서 초급반 중급반까지 수영을 배웠다. 그런데 왜 수영을 배우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물을 좋아했던가? 꼭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물론, 내가 추측하는 이유가 하나 있기는 하다.
어릴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은퇴 무렵에 책을 발간하신 적이 있었다. 너무 어렸던 나는 관심도 없었지만 언니가 그 책을 읽다가 내 이름이 나왔다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드디어 세상에 나의 진가가 알려지게 되는 건가? 싶었지만 사실 그 책에서도 나는 겁쟁이 역할로 등장하고 있었다.
훨씬 더 어렸을 적(네다섯 살쯤 되었으려나) 전교인 수련회로 바닷가를 간 적이 있는데 모래사장 근처에 앉아 발장구 정도 치면서 놀던 나를 목사님이 안고 좀 더 깊은 바다로 가신 모양이다. 그랬더니 금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이렇게 말했더란다.
“목사님 여기는 너무 무서워요 죽을까 봐 겁나요.”
물에 빠져 허우적댔던 경험은 고사하고 바닷가 물놀이도 처음이었을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그 공포는 꽤나 구체적이고 뚜렷한 ‘죽음’의 공포였다. 물론 그 순간엔 ‘아하하 무섭구나’ 하고 금방 나를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보내주면서 상황이 끝났겠지만 어른들에게조차 평범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죽음’이란 단어는 생경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내가 짐작해 보자면 나는 정확하게 ‘죽음’ 그 자체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건 물에 빠지는 일이나, 다시 해변가로 돌려보내 주지 않을까 두려운 것과는 조금 다르다. 과정과 상관없이 당장 내 앞에 ‘죽음’이 와 있다고 원초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제는 은퇴하신 그 목사님은 아직까지도 나만 보면 ‘이제 물 안 무서워?’라고 물어보신다. 교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수영 못하는 겁쟁이가 될 뻔했으나 엄마가 내게 수영을 가르친 덕분에 나는 자신 있게 끄덕이며 ‘이제 그 정도는 껌이죠.’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나는 바다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 역시 마찬가지다.)
어릴 적 느꼈던 원초적 감정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새파란 바닷물에 들어가 있으면 어딘가에서 해파리가 나타나 나를 공격하거나 순식간에 상어가 다리 한쪽을 집어삼킬 것만 같다. 뭐가 다르냐고?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죽지는 않겠거니, 하고 생각할 정도의 짬바가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