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에 놀러 갔을 때 숙소 근처에 플리마켓이 열렸었다.
아이랑 함께 다양한 물건들을 둘러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었다.
한 바퀴를 돌아보고 나서 아이는 반지를 사달라고 했다.
반지 가게 아저씨의 추천으로 아이 이름도 새겼다.
검은색 티타늄 반지.
가격 대비 변형도 없고 색바람도 없다는 상점 아저씨의 말에 기념으로 아이에게 선물로 사주었다.
아무 모양도 없는 검은색 반지를 낀 아이의 손은 귀여웠다. 마냥 이뻤다.
며칠이 지나고 출근준비 중 갑자기 나도 반지를 껴보고 싶어졌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매일 귀걸이도 다르게 끼고 팔지, 반지도 착용하고 다녔었다.
하지만 지금은..
귀걸이는 하고 있지만 몇 년째 똑같은 걸 달고 다닌다.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고 귀찮아서인지 나의 귀걸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득,
그날은 반지를 끼고 싶었다.
악세사리함을 꺼냈다.
분홍색 벨벳 소재의 악세사리함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얇고 가느다란 브이자 형태의 심플한 디자인.
손가락에 꼈을 때 브이의 뾰족한 부분이 손끝 방향으로 향한다.
반지 전체에 작은 큐빅이 박혀 있어 은은하게 반짝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지다.
그런데, 반지를 낀 내 손을 보고 얼른 다시 빼버렸다.
'손에 언제 이렇게 주름이 많아졌지..'
반지의 반짝이는 큐빅이 나의 주름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반짝이는 큐빅. 주름진 나의 손.
그 어색함에 얼른 반지를 빼버렸다.
그리고 뭔가 서글퍼졌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다는 아쉬움과 한탄. 시간이 부족하다는 초조함.
이제는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뭔지 뭐를 속상함이었다.
결혼날짜를 정하고 친지분께 인사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축하한다면서 나의 손을 잡으신 친지분은
'어쩜 손이 이렇게 부드럽고 이쁘냐'라며 연신 내 손을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내 손이 이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게 뻗어있지도 않고 손톱도 짧아
매니큐어를 칠해도 학생손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연신 손을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말해주신 친지분의 말에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의 손은 예뻤던 것이다.
화려한 색깔의 매니큐어를 칠한 잡지에 실려있는 모델의 손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31살 그때의 내 손은 참 예뻤던 것이다.
평일 회사 점심시간에 친한 언니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했다.
'내가 직장 생활한 지 20년이 되어가더라.
주말에 집에서 혼자 맥주 한 잔 하면서 20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더라.
20년이란 세월을 버텨낸 고단함과 수고로움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20년 차 정도가 되면 직장에서 베테랑처럼 어떤 일이든
척척해낼 줄 알았는데 여전히 헤매기도 하고 상사한테 혼나기도 하고 그러네
그리고 어느새 시간은 이렇게 흘렀고..'
언니의 말에 공감도 되면서 20년이란 숫자를 들으니 그 시간 동안 얼마나 고단했을지도 느껴졌다.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언니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르지만
또 40대라는 같은 여정에 있다는 지점에서는 서로의 수고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날 이후 언니와의 짧은 대화는 내내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우리 모두는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구나.
나도 직장생활을 15년째 하고 있구나.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버티고 이렇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구나.'
자격증처럼 나의 성공을 확인해 주는 증서가 없다고 이뤄놓은 게 없다고
한탄할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손을 보았다.
이것이 내 인생의 증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했구나. 실패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힘을 내려고 노력했구나.'
메모지에 명확하게 적은 놓은 목표를 하나씩 지워가는 게 인생이 아니었다.
회사 일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기운 없이
바로 침대로 달려갔던 것도 열심히 살았던 나의 흔적이며,
아이를 낳고 이유식을 만들며 고군분투했던 것도 열심히 살았던 나의 삶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나의 손 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루어 놓은 게 없는 게 아니었다.
내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었다.
큐빅이 박혀 있는 반지는 여전히 반짝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손가락의 주름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내 인생의 수고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는 내가 나의 손을 쓰다듬어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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