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의 현주소

문화의 양극화

by Paul

4차 산업시대가 도래하면서 공영 방송과 라디오 채널이 점차 시청률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이는 인터넷의 대중화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구 선진국 및 개발도상국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눈과 귀를 만족시켜 주는 콘텐츠가 다양해진 까닭이다.
우리나라 TV 뉴스를 보더라도 정치색이 강한 채널이 방송되고 있으며 양극화의 분열은 방송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보수, 진보를 지지하는 연예인 마저 정치 성향에 따라 인기가 나뉘는 현상은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20세기 한국 연예계에서 선거 운동 잘못했다가 밥줄이 끊기는 왕년의 스타들도 더러 있었다.
전 국민이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방송통신위원회'를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로 미디어만 붙여서 개명을 했지만 그 역할은 아직까지 위원회의 특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방송은 시청자가 대중이고 대중의 영향력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장르인 만큼 시청률은 대중의 성향에 따라 인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몇 년째 깊게 패인 양극화의 간극이 뉴스에서 반복되는 현실은 채널에서 드러나고 특히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얼마 전 특정 정당에 전폭적인 지지를 해왔던 조폭 영화의 배우가 한국콘텐츠진흥원장으로 내정됐으나 심사에서 탈락했고 몇 년 전에서 한국 대표적인 공영방송에서 정치 프로그램 MC를 맡았던 코미디언이 숱한 여론의 논란에 얼마 못 가 그만둔 사실이 있었다.
물론 미국도 채널에 따라 정치 성향이 나뉘는 현상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보수 채널은 FOX이고 대표적 진보 채널은 CNN이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White House에 CNN 기자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마치 해외 순방에 MBC 기자의 탑승을 거절한 전직 대통령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제스처(gesture)이다.

그러나 뉴스 채널이 시청자의 성향에 나뉘는 현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방송에 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은 심히 우려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튜브 채널이야 보고 싶은 사람의 취향에 따라 무슨 방송을 보든 사회적 영향력은 공영 방송과 다르지만 전 국민에게 받은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영 방송은 대중에게 미치는 파장이 대단하다.
아직도 장년층과 노년층은 인터넷 보다 TV 방송을 즐겨 보고 뉴스를 여전히 TV에서 시청하는데 이 채널, 저 채널에서 말하는 주장이 차이가 나면 대중은 곧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앞서 항상 보던 뉴스의 색채를 따를 수밖에 없다.
즉 대중은 긍정과 부정을 가늠하지 못한 채 방송에서 주도하는 방향대로 따라가기 마련이고 시청률에 따라 찬반의 골은 깊어진다는 것이며 국민의 가장 큰 장애인 양극화가 TV 방송에서 육성된다는 위험한 사실이다.

한 예로 유명 스타 강사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면 출연하는 채널에 따라 덮어놓고 '민주'와 '보수'로 나눠 그 강사를 매도하는 지적질을 한다.
그 강사의 강의를 듣기도 전에 한 사람을 정치 성향으로 구분 짓는 현실은 이미 요즘 세대의 흐름이며 이 같은 양극화는 방송 문화계에 더해 종교계에도 강한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의 목사가 정치무대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면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인은 그 성직자의 종교를 정치 성향으로 분리해 버리거나 가톨릭의 특정 단체에 몸 담은 성직자도 그와 같은 낙인을 찍어 버린다.
몇 백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매스컴에서 활동하는 몇몇 교회의 수장들 때문에 본인과 상관없는 정치 지지자로 오해받는 결과를 낳는다.
즉 오늘날 한국의 양극화는 경제의 차별을 넘어 문화와 종교계에 까지 분열된 극단적인 대립을 드러내는 것이다.
21세기 세계 경제 서열 13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이 아직도 옳고 그름을 가늠하지 못하는 대중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기성세대 이후 학교교육과 사회적 민주진영의 영향을 흡수하는 한국인으로서 두 정당의 정책에 따라 지지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귀가 얇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유를 들자면 한국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70여 년 밖에 되지 않았고 자유당에 이어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정권에서 문민정부로 들어선 기간이 짧고 서구 민주주의 정치를 여과 없이 도입하는 시기에서 민주시민의 정체성이 모호한 대중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군사정권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운동권 인사들이 정계에 입성하면서 그들을 지지하는 숫자가 갈수록 늘었으며 정파를 떠나 지지층이 모이는 결정적인 원인은 정부에서 민생을 위한 정책이 크나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기성세대 이후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진보와 보수를 지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지만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기 전이었고 국민들의 눈과 귀는 방송과 언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GNP가 늘고 라이프 스타일이 상승하면서 먹고살만해진 세상이 오자 정치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줄어드는 국민이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현실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 원인을 보면 입시 위주의 교육과 가족구조의 변화로 1가구, 1자녀의 가정은 부모가 모두 직장에 다녀야 하는 가정에서 혼자 성장한 자식은 나 홀로 가정에 산다.
가족 구성원의 부재된 상호 작용에서 생각과 행동의 범위는 자신의 욕구의 자유를 스스로 부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규범과 질서가 무너지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편할 대로 편한 생활을 하면서 가치 판단의 기준이 이기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는 뜻이며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자신만의 양심이 실종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세태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직장에선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정부에서 무슨 법을 시행해도 자신의 직업에 직접적인 제한이 없으면 정치에 관심조차 없는 국민이 증가한다는 것은 하루 한 끼 먹고살기 바쁜 국민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곧 팽배한 개인주의는 도덕적 가치와 판단을 모호하게 만들고 윤리의식의 기준이 사라지는 현상을 만든다.
여기에 사소한 간접적 피해일지라도 남에게 주는 것은 명백한 이기주의로 발전하는 것이며 사소한 피해에 무관심한 상태는 이미 개인주의의 범위를 넘은 이기주의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Indivisualism)란 국가, 사회를 총칭하는 하나의 집단이 아닌 개인을 하나의 단위로 규정하고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우선 존중하는 사상을 말하며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이성적 자유를 뜻한다.
개인의 생명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는 전쟁을 통해 1차,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생명을 얻은 사상이다.
개인주의는 사유재산이 가능한 시기에 시작되었고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거치며 개인주의의 개념이 등장하였으며 자본주의의 불공평한 이익 구조와 권력에 대항하는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힘을 실었다.
'개인주의'란 용어는 1840년 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최초로 사용되었다.
개인주의는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상으로 종교, 정치, 사상, 가치관과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철학이며 개인의 권리와 자유, 개성의 강조는 국가 및 사회, 집단의 간섭을 거부하기 때문에 전체주의와 집단주의에 대립되는 사상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개인주의는 상업적 행위와 개인 활동의 자유, 자유 시장 경제에 따르는 자유방임을 주장하며 국가의 통제가 없는 경제 활동을 뜻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사유재산 존중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에 해당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에 적용되는 과실치사의 책임도 해당된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규범과 질서, 공익과 공동체의 안정에 해가 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며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크빌'은 그의 저서를 통해 개인주의를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에게만 관심을 갖는 '온건한 이기주의'라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상이 이 같은 개인주의에 빠진 세태를 일컫는 것 같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지만 지나친 자유와 개성은 사회가 용인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이기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즉 통제와 제한을 넘은 자유는 방종과 일탈이 될 수 있지만 거기에 적용되는 가치 기준이 모호할 수밖에 없고 개인주의의 선을 넘는 이기주의로의 진행에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자세히 대입해 보면 희망이 없는 우리의 젊은 층은 과거 기성세대와 달리 열심히 노력해도 집 한 칸 장만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하루가 지나면 치솟는 물가에 대출 없으면 매달 월세를 내기도 힘겨운 생활에 시달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내일에 희망이 있어야 힘을 내기 마련인데 인터넷 딴 세상의 삶도 다를 바 없는 현실에서 오감만족하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감각을 자극하는 오락과 방송에 시간을 보내고 어찌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와 다름이 없는 생활을 유튜브를 통해 하고 허기가 지면 혼밥을 먹으면서 TV를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모든 방송이 출연자가 먹어 가며 토크쇼를 진행한다.

채널을 돌려 봐도 먹방 프로그램에 스타들이 출연하고 또 다른 채널에선 트로트 가수들이 갈수록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아이들이 기교를 쓰며 목청을 꼬으는 가요는 너무 많이 봐서 이젠 이상하지도 않다.

자고로 방송이란 시청자의 수준을 감안하고 형평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함에도 먹방 프로그램에 시청률이 떨어지면 특급 스타를 초빙해 같이 먹으며 진행을 하고 시청률이 올라가면 또 다른 스타를 초빙해서 다음 편을 제작한다.

물론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은 광고료가 비싸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그런 프로그램을 제재해야 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뭘 하는지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의아할 뿐이며 건전한 문화를 지향해야 할 방송국에서 교육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그러나 문화는 조화와 균형을 통해 발전해야 하는 것이고 한 나라의 대중문화는 국민의 지적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아무리 인구밀도에 따르는 취향이 공통적이라 해도 한쪽으로 편중된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 잡으면 문화의 질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트로트는 서민의 희로애락과 애환을 노래한 장르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대표적인 중년 이상의 연령대가 사랑하는 음악이었으나 요즘은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정 장르의 문화가 사랑받는 사유는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는 시대적 아이콘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조화 없이 성장한 문화는 국민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주의는 돈이 말하는 세상이므로 제작사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수익을 위해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매진한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전파되는 대중문화는 공익과 대중의 정서에 부합해야 하며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으로 위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전 국민이 보는 방송은 모든 채널이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명확해야 하며 무엇보다 공정성을 담보로 제작되어야 한다.
결코 방송사의 의도에 의한 정치색은 절대 포함되서는 안 되며 청소년을 위한 교육적인 측면은 반드시 포함해야 할 의무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 방송도 부적절한 부분은 철저히 차단하고 청소년의 정서에 해가 될 내용이 조금이라도 있는 장면은 전파를 금지한다.

하의를 손으로 만지는 선정적 춤은 TV 쇼에서 방송을 금지하고 토크쇼 생방송 중 출연자가 흥분해 무심코 내뱉은 발언도 순간적으로 버튼음 처리를 하며 특히 시청률이 높다고 특정 장르 위주의 방송을 채널 대부분이 제작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

시대가 변했으니 방송도 변한 것이라 제작측에선 말할 수 있지만 TV공영방송에서 전파를 보내는 방송과 유튜브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구분되야 한다.

방송은 교육과 조화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고 어떤 콘텐츠든 예술의 가치는 시청자의 눈과 귀가 평가하는 것이며 방송은 마땅히 공익을 전제로 제작돼야 한다.
한국의 음식문화와 대중음악의 발전을 부정적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많은 채널에서 보게 되는 예능 프로그램에 항상 식사를 하며 토크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채널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제작해야만 시청률이 오르는 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선진국의 국민 수준은 대중문화로 평가되는 것이며 GNP의 성장은 국민의 지적 수준과 함께 상승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