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라모리스(Albert Lamorisse)는 《새끼 당나귀 빔》으로 이미 독창적인 영화 감각을 확립했다.
빔》은 《백마의 갈기》와 함께 지금까지 영화가 만들어낸 드문 진정한 아동영화일 것이다.
물론 다양한 연령대의 젊은 관객에게 맞는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 분야에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머나먼 돛(Au loin une voile)》 같은 작품은 이미 청년기에 도달한 젊은이를 겨냥한 느낌이 강하다.
J. 아서 랭크(J. Arthur Rank)가 오직 아동만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들은 경제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완전히 실패했다.
실제로 아동 관객을 위한 영화 목록을 만들어 보려 해도, 몇몇 단편이나 일정 수의 상업영화—그중에는 유치한 만화영화나 모험영화도 포함된다—밖에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단순한 아동용 영화가 아니다.
정신 연령 14세 이하의 관객에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미국 영화는 자주 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영화는 진정한 아동문학과 비교할 만한 깊이를 갖지 못한다.
루소가 이미 지적했듯, 진짜 아동문학은 결코 무해하지 않다. 라 퐁텐의 우화는 냉소적인 도덕주의를 품고 있고, 페로의 동화에는 은밀한 상징이 숨어 있으며,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달콤하면서도 오싹한 심연을 지닌다.
요컨대, 아동문학은 언제나 상상력의 힘으로 빛난다.
라모리스의 《빨간 풍선》 역시 이런 전통 위에 놓인다.
다만 그것은 문학보다 더 지적이고, 동시에 덜 ‘아동적’이다.
풍선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신화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비평 대상이 아니라, 영화적 표현과 존재론적 의미를 시험하는 사례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장 투란의 동물영화는 쿨레쇼프 실험*의 전형과 같다.
그는 살아 있는 동물들을 데리고 디즈니 영화를 만들고자 했지만, 실제로 동물에게 부여된 인간적 감정은 관객이 덧씌운 투영일 뿐이다.
화면 바깥의 유도나 장치가 있었고, 편집과 해설이 동물의 움직임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했다.
결국 그의 영화에서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것은 동물의 ‘연기’가 아니라, 몽타주였다.
다시 말해, 투란의 영화는 몽타주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의미의 착각을 보여준다.
반면 라모리스의 《빨간 풍선》은 정반대다. 이 영화는 몽타주에 의존하지 않았고, 애초에 그럴 수도 없었다.
풍선을 ‘동물화’하는 일은 동물을 ‘인간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상적이다. 라모리스의 풍선은 실제 카메라 앞에서 조작된 현실적 사건이며, 착각은 편집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공상적인 기록영화’라 불릴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몽타주는 흔히 영화의 본질로 불리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반(反)영화적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라모리스의 영화가 빛나는 순간은 편집이 아니라, 공간의 단일성을 존중하는 사진적 리얼리즘 속에 있다.
《백마의 갈기》 역시 기록성과 신화성을 결합한다.
카마르그의 풍경과 말들의 습성이라는 현실 위에, 여러 말을 한 마리의 ‘백마’로 치환하는 장치를 통해 신화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많은 장면은 위험을 무릅쓰고 실제로 촬영되었으며, 그 사실성이 신화를 가능하게 했다.
관객은 그것이 트릭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실재라고 믿게 된다. 이때 영화는 단순한 묘기가 아니라, 영화적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영국 영화 《독수리는 이제 날지 않는다(Where No Vultures Fly)》의 한 장면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소년, 부모, 사자가 결국 한 원경 안에 동시에 포착되는 순간, 그 전까지의 평범한 몽타주 장면들이 단숨에 현실성을 획득한다. 사건이 이야기에서 영화적 사건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법칙을 세울 수 있다.
사건의 본질이 둘 이상 요인의 동시적 제시를 요구할 때, 몽타주는 금지된다.
이 원칙은 ‘원 쇼트–원 시퀀스’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본질이다.
오슨 웰스가 《위대한 앰버슨가》를 단일 쇼트로 처리하거나 《미스터 아카딘》을 극도로 분할했을 때, 그는 소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양식을 바꾼 것뿐이다.
하지만 플래허티의 《나누크》 바다표범 사냥 장면처럼 사건의 본질이 동시성에 달려 있다면, 반드시 같은 화면 안에서 보여줘야 한다.
몽타주 금지 법칙은 기록영화, 픽션, 희극 등 장르를 불문하고 적용된다. 기록영화는 사건의 실재성이 핵심이므로, 몽타주를 잘못 쓰면 단순한 설명으로 전락한다.
결국 영화는 몽타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사건이 동시성을 본질로 할 때는 반드시 같은 화면 안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는 소설적 서술로 떨어지고 만다.
반대로 설명이나 추상화가 본질일 때, 몽타주는 그 힘을 발휘한다.
<바쟁의 의견>
바쟁에 따르면 영화의 본질은 몽타주에 있지 않다.
몽타주는 서로 다른 장면을 결합해 의미를 창조해내는 영화적 기법인데, 몽타주는 결국 편집의 산물이고, 이는 사건의 현실성이나 영화의 리얼리즘을 해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그는 영화는 사건이 가진 공간적 단일성과 동시성을 존중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예를 들자면 라모리스의 <빨간풍선>이나 <백마의 갈기>처럼 현실에서 실제로 포착된 장면을 통해 상상력이 발생될 때, 영화는 서커스나 묘기를 넘어 진실된 영화적 사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사건의 본질이 여러 요소의 동시적인 제시를 요구한다면, 몽타주는 금지되어야하며, 영화는 현실의 연속성과 리얼리즘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사견>
몽타주가 배제된 상황에서 영화가 ‘진실된 영화적 사건’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먼저 그 ‘진실된 사건’이 무엇인지부터 규명해야 한다.
나는 영화가 드러내려는 바가 어떤 진실, 혹은 본질의 한 단면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현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건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기대어 있다.
여기서 사건은 하이데거적 의미의 ‘드러남(알레테이아)’에 해당하며, 단순히 눈앞에 주어진 현상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이 마주치는 과정 속에서 의미화되는 장을 뜻한다.
따라서 영화의 매체적 의의는 관객을 이 해석의 지평 속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에 있다. 감독마다 그 방법은 다르겠지만, 바쟁은 그 방법론적 선택으로 리얼리즘을 택했다.
그는 해석의 개방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사건의 동시성과 공간적 단일성’을 존중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론이 닫히지는 않는다.
리얼리즘만이 유일한 해석의 길은 아니며, 몽타주 역시 다른 방식으로 사건의 의미를 조직하고 개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편집인가, 단일성인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각각의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고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는가라는 질문이다.
*쿨레쇼프 실험
쿨레쇼프 실험은 러시아 감독 레프 쿨레쇼프가 제시한 몽타주 이론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무표정한 배우의 얼굴을 촬영한 뒤, 그 장면을 각각 다른 영상과 교차 편집했다.
수프 그릇과 이어 붙였을 때 관객은 배우가 배고파 보인다고 느꼈고, 관 속의 소녀 장면과 함께 보여주면 슬퍼한다고 해석했으며, 침대 위의 여성과 나란히 제시했을 때는 욕망을 품은 것처럼 보았다.
흥미로운 점은 배우의 얼굴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지 앞뒤에 어떤 이미지를 배치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읽어내는 감정과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이 실험은 영화의 힘이 배우의 연기보다도 편집, 즉 몽타주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이후 아이젠슈타인 같은 감독들이 충돌적 몽타주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