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쟁-영화란무엇인가>

윌로 씨와 시간 (Jacques Tati, Les Vacances de

by 대상c

윌로 씨와 시간 (Jacques Tati, Les Vacances de M. Hulot)


<요약>

희극 분야에는 프랑스 영화의 천재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흔한 얘기였는데, 적어도 삼십 년 동안은 그랬다.


다만 금세기 최초 몇 년 동안 프랑스에서 익살스러운 희가극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선두주자는 막스 랭데(Max Linder) 였고, 그의 공식은 곧 맥 세넷(Mack Sennett) 에 의해 헐리우드에서 재현되었다.


그리하여 하롤드 로이드(Harold Lloyd), 해리 랭던(Harry Langdon),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 로렐과 하디(Laurel & Hardy), 그리고 특히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과 같은 배우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헐리우드의 희가극은 프랑스보다 훨씬 화려하게 발전했으며, 채플린 역시 랭데를 스승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1914년 이후 프랑스 희극은 쇠퇴했고, 미국 희극영화의 폭발적 성공에 묻혀버렸다.


토키 이후 헐리우드는 채플린뿐 아니라 W. C. 필즈(W. C. Fields), 마르크스 형제(Marx Brothers), 심지어 로렐과 하디 같은 이류 배우들까지 전통을 쇄신하며 희극영화의 패권을 쥐었다.


반대로 프랑스 토키 희극은 얄팍한 번안에 불과했다.


1930년대 이후 눈에 띄는 배우라곤 레뮈(Raimu) 와 페르낭델(Fernandel) 정도였지만, 이들도 걸작과 인연이 없었다. 빠뇰(Marcel Pagnol) 의 영화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재능을 증명할 작품조차 없었을 것이다. (예외적으로 크리스티앙 자크(Christian-Jaque) 의 〈프랑수아 1세〉, 노엘-노엘(Noël-Noël) 의 경쾌한 작품들이 있기는 했다.)


한편 르네 클레르(René Clair) 는 1934년 〈최후의 억만장자〉 실패 후 영국과 헐리우드로 떠났다. 문제는 배우가 아니라 희극의 양식 자체였다.


희극 전통을 되살리려 한 유일한 독창적 노력은 프레베르 형제(Prévert Brothers) 였다.


그들의 작품들—〈일은 잘 풀려간다〉, 〈안녕, 레오나르〉, 〈뜻밖의 여행〉—을 부흥의 신호탄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지주의적 경향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였다.


개그는 아이디어로만 존재하고 시각화는 사후적으로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웃음은 즉각적이지 않고, 지적 과정 뒤에야 발생했다. 그들의 영화는 직관적 희극성이 없었고, 이는 유머 화가 모리스 앙리(Maurice Henry) 가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못한 이유와도 같다.


결국 프레베르류의 영화는 웃음을 간접적으로만 불러일으켰고, 관객에게 지나친 ‘공모’를 요구하는 부담이 있었다.


이런 배경 위에서,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é) 의 〈우스꽝스러운 드라마〉만이 그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리고 곧 전혀 뜻밖의 이례적 성공작이 등장한다.


바로 자크 타티(Jacques Tati) 의 〈축제일(Jour de fête)〉이었다. 헐값에 찍혔고, 배급사조차 외면했지만, 해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원가의 10배 수익을 올렸다.


타티는 단숨에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그 성공이 일시적이라 보았다. 20년을 뮤직홀에서 버틴 그가 과연 또다시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두 번째 영화 〈돈 카밀로의 귀환〉은 〈축제일〉만 못했다. 하지만 그는 4년 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작품을 내놓는다.


바로 〈윌로 씨의 휴가(Les Vacances de M. Hulot, 1953)〉였다.




윌로 씨의 세계


〈윌로 씨의 휴가〉는 막스 형제와 W. C. 필즈 이래 세계 희극영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토키 영화사에서도 사건적 의미를 지닌다.


위대한 희극영화들처럼 타티는 먼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인물은 그 세계의 산물로, 혼란의 형이상학적 화신처럼 존재한다.


윌로 씨(M. Hulot) 는 우스꽝스럽지만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우스꽝스럽다.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전형적 캐릭터와 달리, 그는 미완성적이고 태도는 불분명하며, 수줍음을 존재론적 원리처럼 체현한다.


세계와의 접촉에서 그의 경솔함은 늘 재앙을 낳지만, 그것은 자애와 자유가 가득한 혼란이다.


휴가지에서 그는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 자동차조차 시대불명의 것이며, 그는 마치 조수(潮水)의 순환처럼 되돌아오는 반복적 시간 속에서 페이드인 하듯 나타난다.


따라서 영화에 정통적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험과 실패는 모두 “다음에 윌로 씨는…” 식의 느슨한 연쇄로 이어질 뿐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시간은 소재가 아니라 목적이다.


행위의 시간 그 자체가 영화의 주제가 된다.




시간과 리듬


휴가 세계에서 행위는 부조리한 속도로 진행된다.


윌로 씨만이 서두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질서를 회복하려 애쓰지만, 그는 그저 유유히 리듬을 산다.


빵집의 밀가루 반죽 장면처럼, 반복되는 상황은 시간에 두께를 부여한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은 사운드트랙이다. 타티는 실제 현장음을 변형·중첩해, 무의미한 대화와 불협화음을 통해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핑퐁공의 과장된 반향음, 불꽃놀이의 인위적 폭음은 현실감을 주면서 동시에 그 허구성을 드러낸다.


단어는 사회적 포장을 벗고 벌거벗은 채 그로테스크한 의미 과잉으로 배회한다.


결국 이 세계에 두께와 정서를 부여하는 것은 소리다.


영화의 마지막 환멸과 슬픔조차 침묵으로부터 비롯된다.




휴가의 끝


아이들의 함성은 언제나 해변 풍경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으로 조용해졌을 때, 그것은 휴가의 종말을 의미한다.


윌로 씨는 불꽃놀이에서 배제된 채 고독하게 남지만, 몇몇 인물들이 은밀히 작별을 고한다.


아이들만이 끝까지 그와 공명한다. 대단원 없는 이 섬세한 결말은 채플린의 최고 걸작에도 견줄 만하다.


<윌로 씨의 휴가〉의 희극성은 엄격한 관찰의 산물이다.


그러나 채플린의 희극성이 종종 페시미즘에 기울었던 것과 달리, 타티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이다.


그의 주인공은 어리석음을 교정 불가능한 가벼움으로 맞받으며, 우연한 사건이 무질서를 흔들고 삶을 놀이로 전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타티는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 전에, 먼저 하나의 세계와 그 시간성을 창조한 것이다.



<바쟁의 시선>


〈윌로 씨의 휴가〉는 프랑스 희극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의 웃음은 윌로 씨라는 캐릭터의 전형적 상황극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핵심은, 그가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미끄러짐을 폭로하는 데 있다.


세계는 느슨한 반복과 연쇄, 나른한 시간성 위에서 돌아간다.


윌로 씨는 이 리듬에 삐끗하며, 그 어긋남이 곧 웃음을 불러낸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체는 시나리오가 아니라 시간성 그 자체다.


웃음은 곧 리듬이며, 리듬의 변주다.





<사견>


예술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일방향적·등속적으로 흘러가는 연속이 아니다.


일상의 시간성은(똑딱이는 시계, 테니스공의 핑퐁처럼) 세계의 질서에 종속된 비본래적 시간이다.


하지만 윌로 씨는 그 질서와 엇박자를 낸다.


자동문에 끼이거나, 불꽃놀이의 타이밍을 놓치는 방식으로 그는 반복해서 미끄러지고, 관객은 그 미끄러짐에 웃음을 터뜨린다.


세계와의 마찰, 어긋남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 영화는 사실 〈윌로 씨의 휴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영화가 이런 방식을 차용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경우에는 이 미끄러짐이 공포와 허무로 다가오고, 또 어떤 경우에는 웃음과 감동으로 다가오는가?


균열의 순간에는 언제나 실재의 한 조각이 드러난다.


주체는 그 맞닥드림 앞에서 보통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드러난 실재의 형상이 위협적이지 않을 때, 주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웃음이다.


이것이 바로 “무해한 드러남”이다.


세상의 규칙이 주는 억눌림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억눌린 긴장의 이완이 곧 희극의 본질이다.


프로이트적으로도, 라캉적으로도 웃음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허술한 드러남은 주이상스(jouissance)보다는 플레지르(plaisir)로 이해하는 편이 옳다.


그러나 간혹, 드러난 실재의 모양새가 위협적이거나 공포스럽지 않은 순간이 있다.


그럴때에 주체의 마땅한 반응은 웃음으로 드러난다.


무해한 드러남.


세상의 규칙이 주는 억눌림에서 해방된것만 같은 억눌린 긴장의 이완 같은 것들이 희극의 본질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적이고, 라캉적인 웃음에대한 해석이다.


이 허술한 드러남은 주이상스라기보다는 플레자르(plaisir)로 해석하는 편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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