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쟁-영화란 무엇인가>4.영화와 탐험

감독은 증언자인가 창조자인가.

by 대상c

3.영화와 탐험.


<요약>

장 테브노는 《원정 영화》에서 이 장르가 1920년대에 첫 전성기를 맞고, 1930~40년대에 이국 취향의 소모로 쇠퇴했다가, 전후에 사실성으로 되돌아오며 부활했다고 봅니다.


출발점에는 폰팅의 〈영원한 침묵〉과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누크〉가 있었고, 곧 ‘백색 영화’의 성공을 타고 열대·아프리카로 무대가 확장됩니다.


이 초기 걸작들의 힘은 지금 보아도 낡지 않는 시적 진실성에 있었지만, 특히 태평양권 작품군(〈모아나〉–〈남해의 흰 그림자〉–〈터부〉)에서는 서구가 먼 문명을 신화화해 바라보는 이국정취라는 시선이 함께 굳어졌습니다.


발성영화와 몽타주가 등장하자 ‘스냅식 이국감’이 화면 언어로 번역되며 한때 신선함을 주었지만, 곧 자극과 스펙터클 경쟁으로 기울면서 소진됩니다.


〈아프리카는 말한다〉의 악어 장면이나 〈트레이더 혼〉의 코뿔소 습격처럼 의심스러운 연출은 ‘야만·맹수’의 도식을 강화했고, 그 여파는 〈타잔〉, 〈솔로몬 왕의 광산〉 같은 상업 모험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을 거친 관객은 더 이상 장식된 이국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진실을 요구했고, 전후의 원정 영화는 과학적·민속학적 태도로 방향을 틀어 탐험가의 태도와 심리, 현지인에 대한 이해를 전면에 올립니다.


동시에 탐험의 증언은 책·강연·라디오·TV와 결합한 복합 형식으로 유통되어, 영화 단독의 전지적 설명 욕망은 한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이 변화는 사례에서 분명합니다.


스콧 탐험을 재구성한 〈돌아오지 않는 모험〉은 실제 남극이 아닌 노르웨이·스위스 빙하에서 대체 촬영해 현실의 긴장을 잃었고, 전후의 르포 기준에 비추어 시대착오적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그린란드〉는 영화팀이 탐험대의 일부로 편입되어 증언자의 자유를 확보한 경우이고, 〈콘티키 호 표류기〉는 아마추어 촬영과 16fps, 흔들림·노출 실패에도 불구하고 모험과 촬영 행위가 포개진 자리에서 불완전성이 곧 진실의 흔적이 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마르셀 이샥의 〈안나푸르나의 승리〉에는 결정적 등정 영상이 없지만, 대신 끝없는 하산의 고통이 카메라 곁에서 기록되어, 텍스트의 정확성과 영상의 구체성이 어떻게 다른 감동을 만드는지 대비시킵니다.


종합하면, 원정 영화는 이국의 장식에서 현장의 진실로 축을 옮겨왔고, 오늘의 기준은 자극이 아니라 객관에 가까운 기록성과 인간의 얼굴입니다.


완전한 재현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 결핍을 드러내는 순간에야 비로소 화면은 탐험의 진실에 가장 가까워집니다.




<바쟁의 시선>


바쟁에게 카메라는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매개하는 기계적 창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나 미학적 조작이 아니라, 카메라가 우연히, 기계적으로, 시간과 사건의 흔적을 담아내는 힘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재현의 정확성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진리란 존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 곧 세계가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순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 양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는 언제나 드러남과 은폐가 동시에 얽힌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현실의 완전한 복제는 불가능합니다. 바쟁에게 영화의 진실은 오히려 결핍과 불완전성 속에서 더 강렬하게 드러난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감독은 이 불완전한 드러남을 억지로 봉합하거나 꾸며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 불균질과 틈을 고스란히 포착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화의 리얼리즘적 가치는 그곳에 놓여 있다고 바쟁은 믿었습니다.




<사견>


바쟁은 영화를 포착의 예술로 보았습니다. 카메라는 세계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장치이며, 감독은 창조자라기보다 증언자에 가깝습니다.


그의 리얼리즘은 재현의 정확성이 아니라, 세계가 우연히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데 가치를 둡니다.


따라서 영화의 진실은 완전무결한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성과 틈 속에서 더 강렬히 드러난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 태도는 곧 아이젠슈타인과 같은 몽타주론자들의 입장과 충돌합니다.


아이젠슈타인에게 영화는 단순한 포착이 아니라, 의도적 충돌과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는 감독을 단순한 증언자가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드러내고 사유를 이끌어내는 창조적 실천자로 위치시켰습니다.


바쟁이 ‘현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내버려두는’ 리얼리즘을 옹호했다면, 아이젠슈타인은 현실을 해체하고 다시 엮어 새로운 진리를 ‘만드는’ 창조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셈입니다.


이 긴장은 누벨바그에서 다시 변주됩니다.


트뤼포와 고다르는 모두 바쟁의 제자였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트뤼포는 바쟁의 리얼리즘적 신념을 이어받아 개인적이고 진솔한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 드러내려 했습니다.


반면 고다르는 아이젠슈타인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는 편집과 인용, 해체를 통해 영화를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사유의 장치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화의 역사는 단순한 리얼리즘의 역사라기보다, 포착과 창조의 긴장속에서 흘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쟁이 강조한 포착의 윤리는 여전히 영화의 바탕이 되지만, 감독들은 곧 세계의 균열을 단순히 목격하는 것을 넘어, 편집과 해석을 통해 그것을 창조적으로 증언하려 했습니다.


회화가 사진의 발명 이후 단순 재현을 벗어나 인상주의, 입체파, 추상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영화 역시 리얼리즘에서 작가주의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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