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후병을 뜻하는 군사 용어 아방가르드는 종종 모더니즘 Modernism과 동의의처럼 사용된다.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20세기 초반 유럽의 미술을 지배했으나 특정 지을 수 있는 미술사적 양식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 존재의 도드라짐으로 인해 아방가르드는 미술의 양식이 아니라 실험정신에 가득한 '운동'으로서 미술사에 자리한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미술의 양식'은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수십 년간 지속되는 안정적인 형식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인상주의 이후, 미술의 양식은 그 수명이 점차 짧아졌고 20세기에 들어와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화풍이 하나씩 태어난다고 말할 정도로 혼란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짧은 시간 존속하다가 사라지는 다수 양식들의 어지러운 공존, 그것이 바로 '모던' 이라는 시대가 가지는 특징이었다.
야수파 입체주의 절대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신즉물주의 구축주의 데스테일 바우하우스 등의 아방가르드 예술 활동은 정치판의 군소 정당보다 더한 생성과 분열, 소멸을 되풀이했고
치열한 선언서와 빽빽한 철학의 해설서 없인 그들의 미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그림에서는 미술의 고전적 사명인 대상의 사실적 재현과 전통의 미학은 사라지고, 풍자와 허무, 꿈과 환상 등의 강렬하고 거북한 표현과 트라우마, 물질과 이성의 비판, 절대 단순 등 난해하고 강렬한 의미의 정신들이 화폭을 지배했다.
형상은 빈곤했고 철학은 넘쳐흘렀다.
이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미술이 난해한 철학서처럼 변질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기, 사진의 출현으로 대상을 공들여 재현하는 회화의 기본 목적은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으며, 유럽은 전쟁과 혁명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쇠퇴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으며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다.
신은 죽었고 이념과 인간의 관념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이제껏 세상을 유지해왔던 '절대적 질서'에 회의하게 된다.
하루살이처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인간성은 상실되었으며 퇴폐와 허무주의가 유럽을 뒤덮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갈망하는 예술혼은 끈질지게 살아 숨쉬었고,
새 시대를 향한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모더니즘은 탄생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속에서 본질의 책무인 형태와 색채의 재현을 포기한 미술은 되레 해체를 선택한다.
원색의 향연과 색채의 해방으로 야수파란 이름을 얻게한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은 그 신호탄이었다.
색채의 해방은 곧 형태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야수주의에 가담했던 브라크는 피카소와 더불어 현실을 파편으로 분해하여 재조립한다.
형태를 무시하고 공간과 인물등 모든 것을 기하학적 입방체로 축약한 브라크에 대한 조소적 작품평이 Cubism이란 명칭을 탄생시키며,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회화를 지배해왔던 원근법적 공간을 무너뜨리는 회화의 혁명을 가져왔다.
비교적 제한적 영향을 미쳤던 야수파에 비해 cubism 은 20세기에 나타난 거의 모든 예술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색채의 해방과 형태의 해방, 그리고 원근법적 공간의 해체 다음에 올수 있는 회화는 어떤 것일까.
Cubism이 지향한 것은 시점과 원근법의 해체이지 재현 그 자체를 포기한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칸딘스키는 한걸음 더 나아간 순수 회화에 도전한다.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회화로 어떻게 정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은 현실을 재현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정서적 울림과 감동을 주지 않는가.
이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색과 기하학적 형태 만으로 완전한 자율성에 도달하는 그림.
마침내 칸디스키는 일체의 사실적 재현을 포기한 추상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추상을 향한 회화의 운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연의 한 귀퉁이를 흉내내거나 부끄러운 줄 모르는 비너스의 그림을 바라보는 습성이 사라질때 비로소 순수하게 살아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될 것이다."
1915년 말레비치가 39점의 비구상 회화를 출품한 마지막 미래주의전에서 천명한 선언문이다.
칸딘스키, 몬드리안의 추상이 단순화한 대상의
구성으로 형태 및 색채 라는 요소들은 존재한 반면, 말레비치의 화면에서는 모든 형태와 색은 사라진다.
오로지 하나의 검은 사각형만이 남는다.
회화의 0도(zero degree)
"왜 나는 사각형을 검게 칠하는가? 그것이 인간의 감수성이 할 수있는 가장 겸허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회화는 형태와 색채마저 사라지는 절대주의로 이행한다.
무의 경지에 도달한 검은 사각형과 함께 철물점에서 사온 변기가 예술품으로 전시 되는 뒤샹의 실험으로
아방가르드의 예술 행위는 절정에 도달한다.
화가는 모든 제한적 대상을 버려야 한다.
말레비치의 선언에 따르면 자연을 대상으로 모방,묘사해온 기존의 모든 미술은 야만의 예술로 규정 된다.
그러나 예술을 보는 또다른 관점이 존재해야 예술은 진보할 수 있을 것 이다.
'모더니즘은 퇴폐 미술이며 그 중심은 상실 되었다.'
독일의 보수적 미술 사학자인 제들 마이어는 이런 행위가 “예술이 사라지게 되는 변경에 한계점을 찍은 것” 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야수파표현주의입체주의절대주의미래주의다다이즘초현실주의신즉물주의구축주의데스테일바우하우스 .......등 모든 아방가르드의 시도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지루한 일이 될 것이다.
압축하면 이들의 그림은 자극적 흥미로움에 눈길은 가나 아름답지않다. 그림을 보는 것이 즐겁기는커녕 차라리 고통스럽다.
아방가르드는 대중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공감하는 소수에게만 존재하는 엘리트적 예술이 된다.
그렇다면 미학이 사라진 회화에서 모더니즘이 추구하는 예술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모더니즘은 미적, 감성적 쾌감이 아니라 지성적 충격을, 전통의 거부를, 불구화한 형식을 통해 스스로 추해짐으로서 불구화된 현대사회를 고발 한다.....
진중권의 모더니즘 편은 여기저기 인용의 짜집기로 현대 예술의 미학을 대변하고 갈무리하려한다.
그러나 그 전파는 느끼고 흡수하지 않으면 기괴하고 서툰 아마튜어의 그 림밖에는 되지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들의 그림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모셔져 현대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해할수없는 추상과 공장에서 양산된 작품들마저 상상을 초월한 고가로 경매장에 나타난다.
이를 흉내낸 그림들 또한 실험과 시도가 아닌 모방의 명함을 불쑥불쑥 내민다.
제들마이어는 모더니즘의 길거리 행사에서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소리치는 순진한 소년 일 것이다.
그는 모더니즘의 속성을 낱낱이 해부함으로써, 예술이라면 고상한 척 찬탄을 자아내기만 하는 사이비 감상자들을 민망하게 만든다.
" .....이 극단적으로 주관적이고 마치 사이비 종교같은 비교적인 예술은....선전을 통하여 수용자들에게 억지로 파고들아가야 한다....이를 수용하지않는 사람은 예술을 모르는 속물이거나 수구적으로 낙인찍히는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의 시각에 동의하는가와는 관계없이, 모더니즘을 바라보아야하는 우리는, 나는 현대예술의 진보주의자가 될 것인가 보수주의자로 남을 것 인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