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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Dec 02. 2024

딸에게 남기는 나의 비각 (12)

스핑크스와 글쓰기

인생길을 걷다가 스핑크스를 만날 때가 있다. 그 스핑크스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스핑크스는 나를 잡아먹을 것이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대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우물쭈물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관대한 스핑크스는 말한다. “대답을 구할 시간을 주겠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다. 도망가면 무의미한 인생을 살 것이다. 인간들은 그것을 지옥 같은 삶이라 말하더라.”


(지금은 네가 어리지만) 너도 언젠가 그 스핑크스를 만날 것이다. 그러면 당황하지 말고 지금 나의 말을 떠올려 보거라. “이제 나비가 될 시간이 왔다. 너의 고치 안으로 들어가 글을 쓰거라.” 글은 그동안 몰랐던 나를 만나는 일이며, 그 만남은 나의 존재를 뒤흔들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삶의 고통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뜻이다. 평온할 때에는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실존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고통이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고통이 나에게 질문할수록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나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니체는 고통은 해석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실체가 아닌 해석된 고통이라는 것이다. 나의 고통을 나의 언어로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이 가능할 때 나를 둘러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글쓰기는 고통의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사람은 힘들어야 비로소 생각을 하기 시작하며,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은 자기의 언어로 실존의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책을 읽다 보면 감동을 느끼고 그 감동을 글로 쓰다 보면 나만의 언어가 생성됨을 느낄 수 있다. 나의 언어는 나의 행동과 신체를 바꾼다. 하이데거 선생이 말씀하셨듯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내가 만든 언어로 나의 실존을 세우는 것이 인생이다. 튼튼하게 세워진 실존은 남의 언어에 의해 나의 삶을 해석당하지 않는다.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이다. 글을 쓰면 알게 된다. 그동안 몰랐던 내 마음을. 나의 생각과 욕망들을 글로 써 내려가다 보면 그동안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글로 나의 마음과 이야기를 하면 고통이 고요한 평안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는 고통을 응시하게 하는 힘을 준다. 고통은 안개와도 같다. 글자가 모여 문장이 될수록 고통의 안개는 옅어지면서 내 고통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이것을 통찰이라 부르며 그 과정이 성찰이라 말한다.


나의 무의식은 각종 방어기제로 둘러싸야 있어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기 마련이다. 스핑크스가 던진 질문의 해답도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내 마음 가장 어두운 곳에 삶의 해답이 숨어 있는 법이다. 새로운 언어가 무의식을 일깨운다. 내 마음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글쓰기이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다. 자기 검열의 그물을 걷어내고 모든 생각을 계속 적어 나간다. 정직함을 통과하면 메시지가 남는다. 그 메시지가 더해진 존재는 무거워지는 법이다. 나의 글은 닻이 되어 한 계단씩 온갖 오물로 뒤덮인 나의 심연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글쓰기는 나의 오물을 걷어내고 통과하는 과정이다. 우울, 불안, 상처들로 덮어진 나에게로 다가가는 일이다. 


내 무의식으로 다가갈 때 외부의 침입자라고 판단한 무의식은 고통을 내던진다. 하지만 고통은 치유받고자 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치유는 그 상처를 그대로 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 고통을 한 문장씩 치환하여 솔직하게 이해하고 껴안는 과정이 성찰이고 글쓰기의 치유 효과이다. 나의 고통과 상처는 글로써 발아될 때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글쓰기는 발설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내 몸 안에 감금되어 있던 나의 욕망들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내가 몰랐던 나를 아는 순간 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인어공주는 인간의 육체를 얻는 대신 말을 잃었다. 말할 수 없고 욕망을 발설할 수 없는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어 사라졌듯이 발설되지 못한 상처는 내 존재를 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다. 발설함으로써 나의 욕망을 알게 되고 치유의 열쇠가 되며 결국 나를 구원하게 된다. 말해도 되는 것만 말하도록 검열하는 세상에서 숨겨진 나의 욕망을 토해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내 앞에 놓인 종이 위에 나의 모든 것을 토해낸다. 그리고, 내 발설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잘 보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부모에게 자식의 똥은 더럽지 않은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도 네 똥이 더럽지 않다) 나의 발설물 아니 배설물이 더럽게 느끼지 않아야 비로소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해자가 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다. 평소에 나 자신을 미워했다면 내가 스스로 나를 악마로 만든 것이다. 충분히 사랑받으면 스스로 떠나간다. 내 안의 악마 같은 모습을 바라봐 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 그 악마는 허물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전쟁 같은 삶에서 가족의 행복,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발악하다 나도 모르게 괴물로 변해버린 나.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 내 안의 나를 해방시켜야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다. 글쓰기의 목적은 이처럼 내 안의 하이드를 잘 떠나보내는 일이다. 악마의 심장까지 끝까지 파고들어 가 사랑의 키스를 남기는 것이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지금까지 아주 잘 버티어 주었어. 난 네가 무척 자랑스러워. 네가 살아주어서 지금의 내가 구원받았어.” 사랑받음을 확인한 괴물의 심장은 찬란한 발산과 함께 내 삶의 에너지로 바뀔 것이다.


쓰다 보면 알게 된다. 시작은 세상에 대한 저주였지만 결말은 희망으로 끝난다는 것을. 쓰다 보면 내가 스스로 답을 찾는다는 것을. 그 이유는 글을 쓰면 객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화란 자기 자신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다. 글은 논리적 구조인 문법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어떤 격렬한 감정도 문법이라는 논리의 터널을 통과하다 보면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혼란스러운 나의 현실이 정리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쓰기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다시 방향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같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정쩡한 내 삶에 질서를 부여해 준다.


글쓰기는 생각이 생각을 부르는 연상작용이다. 한 문장, 한 문장 떠오르는 연상을 이어가다 보면 글을 쓰다 보면 고통스러웠던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을 라이터스 하이 writer’s high라고 부르고 싶다. 마치 마라톤 선수들이 느끼는 러너스 하이처럼 말이다. 고통이 사라지고 고요함과 행복으로 채워진다. 러너스 하이를 느끼면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듯이 ‘라이터스 하이’를 느끼는 순간 영원히 쓰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 라이터스 하이를 느끼다 보면 처음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길로 안내할 때가 있다. 그리고 글쓰기가 나를 우주의 모든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혹시 아는가? 글쓰기가 나를 다른 평행우주로 안내해 줄지. 그리고 그 몰입이 끝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쓰는 만큼 몸에 새겨지는 법이다. 내가 썼던 글들은 내 기억에서 사라질 수는 있어도 내 몸 어딘가에 각인되어 나를 변화시킬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 기본 법칙 중에 ‘양질전화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양이 많아지다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질적인 변화가 온다는 뜻이다. 얼음이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글쓰기가 쌓여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허물이 벗겨지고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찢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성장이라 부르며 글쓰기가 쌓인 언덕에서 나의 주체성과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 글쓰기는 지나간 과거의 성찰이자 현재의 실존 양식이며 미래의 나의 역사를 미리 쓰는 것이다.


글쓰기는 결국은 이야기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다 비슷하다. 지옥을 지나 천국에 도착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천국은 지옥 끝에 있는 법이다. 지옥의 출구와 천국의 입구는 같다. 글쓰기는 현재의 지옥을 견디는 기록이며 나의 천국을 정의하는 철학적 수단이다. 글쓰기는 자본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내 이야기에 편집권을 지켜내어 내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다. 소외된 내 삶을 돌아보고 타인을 소외시키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며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에서 지옥을 견뎌낸 나만의 이야기를 남기는 기록이다. 글을 쓰다 보면 너만의 이야기가 생길 것이다. 너의 지옥을 어떻게 견디고 천국에 도착했는지를. 글쓰기로 생성된 나만의 의미로 지옥을 버틸 수 있다. 결국 글쓰기가 나를 구원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처럼 불행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제각각의 고통을 통과한 글들이 쌓이고 연결된 고통의 지혜는 사회적 자산이 되기도 한다. 지혜의 거름이 된 나의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다. 내 고통의 해독제는 타인에게도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쓰고 그 이야기를 공유하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타인의 삶에 접속될 수 있다. 타인의 경험과 그 지혜와 연결될수록 우리 사회의 치유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돌멩이 하나가 닥쳐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지만 그 돌멩이들이 쌓이면 방파제가 될 수 있다. 우리들의 글쓰기가 쌓이면 새로운 사회적 언어를 창조할 수 있으며 그 언어들이 우리 모두의 존재적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독재자들은 늘 글을 쓰는 사람들을 경계했고 탄압했다. 하지만 글을 쓰고자 하는 자유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감옥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네 편의 편지는 현재 성경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람시, 신영복, 오스카 와일드, 박노해, 안중근, 마르코 폴로, 세르반테스 등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도 글을 썼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유배 생활동안 약 500권의 책을 저술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솔제니친, 빅터 프랭클은 그 끔찍한 수용소 안에서도 글을 썼다.


전신마비가 되어 육체의 감옥에 갇힌 사람도 글을 썼다. 프랑스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는 43세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들과 함께 연극을 보러 차를 운전하며 가던 도중 정신을 잃고 만다. 장 보비는 쓰러진 후 3주 만에 깨어나기 했지만 잠금 증후군을 앓게 된다. 잠금 증후군은 뇌간이 손상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마비되어 환자가 자신의 몸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장 보비는 오로지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언어치료사 앙리에트 뒤랑은 그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왼쪽 눈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프랑스에서 자주 사용하는 빈도에 따라 배열한 철자 차트를 이용하여 그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법 제시한다. 장 보비가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게 한 뒤 사용 빈도수가 높은 철자를 순서대로 읽어 주다가 원하는 글자가 나오면 눈을 깜박이는 방식이었다. 장 보비는 왼쪽 눈꺼풀을 움직여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그는 글을 썼다. 20만 번 이상 눈을 깜박여서 15개월 동안 글을 써서 책을 냈다. 그렇게 해서 ‘잠수종과 나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고 곧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유를 구속당한 상태에서도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은 억압된 존재를 해방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멋진 조각상을 만들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조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 거대한 석회 덩어리 안에 이미 있던 영혼을 끄집어낼 뿐입니다.” 글쓰기는 조각과 같다. 열심히 깎다 보면 나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 너의 글쓰기가 너를 해방시키기를 바란다.


젊은 날의 나는 스핑크스가 찾는 현상수배자였다. 나의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고 늘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누적되는 고통은 내 안의 모순을 만들어 뫼비우스의 띠처럼 달아날 수 없는 지옥이 되었다. 그때 흐르는 눈물이 나의 언어를 대신해 주었지만 눈물의 강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더 멀게 만들 뿐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는 나처럼 철학적 도망자의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너의 이야기를 가지고 너에게 질문을 던진 스핑크스를 당당히 찾아가거라. 그리고 온몸으로 써가고 있는 너의 이야기를 들려 주거라. 그러면 스핑크스는 ‘너’라는 드라마에 매료되어 너의 진정한 팬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가끔 스핑크스가 찾아와 다음 시즌 드라마를 궁금해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성장하고 있는, 지옥을 견디며 천국의 입구로 점점 더 다가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21세기 천일야화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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