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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여 Jul 31. 2024

다름과 틀림을 바라보는 다른 생각

  흔히 다름을 인정하라고 충고하곤 한다. 다름은 대립하는 두 개 이상의 가치가 조화로움의 범위 안에 존재할 때 성립한다. 세상의 조화를 깨뜨리는 가치와 조화로움의 범위 안에 있는 그것을 다름이라는 단어로 포장하여 비교할 순 없다. 세상의 조화를 깨뜨리는 가치는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 규정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틀림이 아닌 다름일 경우에 성립하는 말이다. 따라서 틀림을 대면했을 때 다름을 인정하라는 가치 혼돈의 늪에서 빠져나와 과감히 그 틀림을 조화의 궤도로 이끌어야 한다. 그때 조화로움을 밟으며 나아가는 도로(道) 위에 펼쳐진 다양한 경로의 다름을 발견하게 되고, 비로소 다름을 인정하라는 말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무위無為를 행하고자 하는 노자도 유위有為의 칼을 들고 틀림에 대한 전쟁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름의 범위 안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했다. 이것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다.



* 이것은 시가 아니다. 사유의 결과를 기록한 에세이에 가까운 단문이라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다름을 인정하라는 충고들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칫 혼동의 사회가 올 수 있다. 그렇다면 틀림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얼까? 틀림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공동선이다. 공동선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나 사회또는  인류를 위한 선"이라 정의되어 있지만, 한 차원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보편타당한 좋음"일 것이다. 공동선은 조화로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 그것을 알아챌 수 있다. 트렌드를 알아채는 것은 중요하지만 트렌드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 다름을 인정하자는 메시지가 트렌드로 유행하고 있다지만, 그 안에서 건너뛴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여 틀림을 바로잡는 명제도 간과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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