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1
심심하다. 너무 심심하다 못해 글을 쓴다. 심심해서 글을 쓸 정도면 보통 심심하단 뜻이 아니다.
브런치에 글을 써보자고 마음먹은 건 작년 가을 즈음이었다. 하지만 여태 쓰지 못했다. 브런치에 글을 써야겠다 싶을 정도로 심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이렇다.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쓰기 전에 마음만 너무 많이 먹어서 체한 것이다. 나는 담낭이 없어서 쉽게 탈이 나는 편이다.
하여튼 내가 좀 그렇다. 김칫국 마시기가 주특기이고, 김칫국만 마시다가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속을 배려서 결국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
그래서 그냥 일기(라는 이름으로 아무 글이나)를 쓰기로 했다.
억지로 주제를 잡아서 그 주제에 나를 묶고 가둔다면 사랑도 묶인 채 미래도 묶인 채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는 유리멘탈 인간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마침 야식을 먹은 참이라 김칫국이든 뭐든 더 들어갈 여유도 없어서 여러모로 시작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인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 말을 하는 김에 이어서 더 아무 말이나 해보자면, 아까 야식을 먹은 뒤 안 먹은 척 스스로를 속이며 다시 침대에 누우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위장이 '나 죽겠네'를 연발해서였다. '하루종일 집안에 처박혀 있으면서 먹을 것만 잔뜩 밀어 넣고 시치미 떼면 다냐, 일은 나더러 다 하라는 거냐'고 난리를 쳐서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의 말을 무시해도 괜찮은 나이는 이미 지났으니까 당장 뒈지지 않으려면 이 정도 말은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소화를 시킬 겸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 간간이 서 있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얼어붙은 나비들의 시체가 흩날리듯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산책하고 있는 검은색 패딩 애벌레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는 걷다 말고 뭔가를 발견한 듯 멈춰 서더니 담뱃불이 남아 있는 꽁초를 비벼 끄듯 눈을 짓밟았다. 너무 멀어서 무엇을 밟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 그런 풍경을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동안 나는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웃집에 들리지 않을 크기의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렀다. 끝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노래를. 어둠 속에서도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이들을 바라보며. 눈이 녹으면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발자국과 오로지 내게만 들리는 작은 속삭임이 조금 닮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노래가 끝나고 책상에 앉아 몇 년 전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받았던 몰스킨 노트의 포장을 깠다. 그런데 새 노트에 적을 첫 문장을 생각하는 일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펜을 드는 대신 헤드폰을 꼈다. 노래가 바뀌고 익숙한 전주가 흘렀다. 헤드폰 때문에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음악이 내 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일렁이는 표면 위로 이내 그리운 풍경이 하나 떠올랐다.
5년도 더 된 어느 날,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던 초록빛 산책로.
낯선 여행지에서 의도치 않게 맞닥뜨린 풍경이었다. 넘쳐나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서 산책이나 할까 하고 딱히 관심도 없는 유적지 비스무리한 곳에 들어갔더니 산책로 중간중간에 뜬금없이 오래된 대포 같은 것이 나타났다. 나는 조금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다 알고 여기에 왔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곳에는 늘씬한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거나 가볍게 조깅을 하고 있는, 누가 봐도 동네 주민인 것 같은 사람들뿐 아니라 팸플릿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관광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동네 주민처럼 느긋한 표정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며 산책로를 크게 몇 바퀴 돌았다. 속으로는 '기왕 온 여행이니까 좀 더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죄책감을 뒤로한 채, 나는 걷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라고 나 자신을 속이면서,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그때는 있었던 가수의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날의 풍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겨울밤, 이런 식으로 문득 떠올릴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당시 나는 돈과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다는 죄책감과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우울감에 쫓기듯 그저 걷고, 또 걷고 있었다.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불안감. 그 감정을 지금 다시 선명하게 떠올린 이유는 그때 느낀 것과 비슷한 불안을 지금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이 노래를 들었기 때문일까.
하필 오늘 이 노래를 듣는 바람에,
그것도 헤드폰으로 들어서 새어나갈 곳 없이 노래가 그대로 내 마음에 고여버리는 바람에,
마침 또 심심해서 그렇게 고인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바람에,
그때의 불안과 지금의 불안이 거울처럼 마주 보게 되는 바람에,
그래서 오래 전의 풍경이 떠오른 걸까.
음악을 듣다 보면 이렇게 어떤 특정한 날의 기억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기억 속에는 늘 나 혼자 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텅 빈 공간을 혼자서 하염없이 걷고 있는 나.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나로 가득 채워지는 기억.
그 기억은 무용하다.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이 아니므로. 마치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지식은 쓸모를 가질 수 없듯이.
하지만 쓸모가 없더라도 아니,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리고 불필요한 여백을 잘라내어 아름다운 부분만 남긴 액자 속 사진이 그렇듯이, 특정한 노래 속에 갇혀있는 기억 또한 아름답다.
누군가가 음악이란 의미 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무용한 시간일지라도 음악이 덧씌워지는 것만으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한다. 깊이 파고들면 그때 느꼈던 자질구레한 감정들이 먼지처럼 일어나 아름다움을 덮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나면 그 무용한 감정들도 스노볼 속의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을까? 그렇게 되면 결국엔 온전한 아름다움만이 남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무용함이란 무용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 테고, 눈이 내리지 않는 스노볼 따위는 밋밋하니까.
가라앉아 있던 무용한 시간들과 무용한 감정들이 눈과 함께 흩날려 시야가 뿌예지는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