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프랑스 노르망디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예술적 감성을 키우며 성장한 크리스찬 디올은 건축학 전공을 원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정치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학업은 미뤄두고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렸던 그는 결국 아버지로부터 지원을 받아 아트갤러리를 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와 형을 잃는 충격과 함께 경제 공황으로 아버지의 파산까지 겪으면서 갤러리를 정리해야 했고, 생계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그때 패션 드로잉을 그려서 팔았던 것이 디자이너의 길로 향하는 첫 걸음이었다.
1946년 12월, 섬유업계 재력가 마르셀 부싹(Marcel Boussac)의 투자를 받아 드디어 자신의 부틱을 가질 기회를 얻은 크리스찬 디올은, 1947년 2월 12일, 자신의 첫 부틱을 오픈했다.
상체의 곡선은 부드럽게 드러내고 가는 허리 아래로는 스커트 자락이 풍성하게 퍼지도록 연출해 여성미를 극대화시킨 디올의 작품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어둡고 경직되어 있었던 당시의 옷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디자인이었다. 이는 미국 하퍼스바자의 편집장에 의해 ‘뉴 룩(New Look)’으로 이름 붙여져 보도되며 새로운 패션계의 리더로 주목 받았다.
뉴룩의 특징은 둥글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 잘록한 허리, 다시 허리에서 부터 둥글게 퍼지는 힙이 특징이다. 잘록한 허리의 테일러드 슈트는 '바Bar'슈트라고 불린다. 잘록한 허리를 위해서 코르셋이 사용되었고 우아하게 퍼지는 이 스커트를 위해서는 패티코트를 착용해야 했다고 하는데,디올이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의 상류층 옷차림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6년 알제리아에서 태어난 이브 로랑은 17 세에(1954년)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한 디자인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칵테일 드레스로 최우수상을 획득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디오르에게 채용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브 생 로랑은 약관 21세의 나 이로 디오르 메종의 뒤를 잇게 된 것이다. 1958년 1월 디오르사에서 이브 생 로랑이 디 자인한 최초의 컬렉션인 트라페즈 룩(Trapeze Look) 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트라페즈 룩의 옷은 슈미즈 드레스의 변형인 색(Sack) 드레스에 불과했 으나, 스커트 길이를 짧게 한 젊은 분위기가 효과를 내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이브 생 로 랑이 디오르사를 떠나기 전에 발표한 드레스를 살펴 보면 그의 형태는 구조적이라기보다는 몸에 적당히 밀착된 자연스러운 형태이다叫 몸에 흐르는 듯 부드 러운 실루엣과 적절한 크기의 리본 장식, 스커트 부 분에 꽃 봉우리처럼 적절한 볼륨감을 준 스타일, 스커트 허리부분에 균일하게 셔링을 잡아 리 듬감을 준 스타일 .등은 디오르의 구조적이고 절제된 라인의 정교함과 인위적으로 손질된 엘레강스를 편 안하고 자연스러운 스타일로 재현하였다.
창시자인 디오르의 정신 을 살리며 현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작품을 만든다. 또 항상 디오르의 고귀한 엘레강스를 의식한 작품이 되도록 배려하고 있다.
1961년 봄 제 1회 컬렉션은 슬림 룩(Slim Look)이 주류를 이루었다. 슬림 룩은 단순하고 입기 편하다 고 해서 호평을 받았다. 그는 계속해서 페미닌 룩 등 엘레강스한 여성다움 속에 젊음과 스포티함을 가미 시킨 멋진 파리지엔느 스타일을 만들어냈다,미니에 대한 찬반양론이 꼬리를 물고 있던 1966년 가을, 미 니에 롱코트를 코디한 절충적인 스타일을 선보여서 호평을 얻었다. 1974년부터 프레타포르테 영역까지 손수 관장하게 되자 작품 경향은 더욱 더 젊음과 캐 주얼한 경향을 강조하였다 그의 오뜨꾸띄르 컬렉션 은 항상 품위가 있고 섹시한 감각을 유지하였다,그러나 78년 가을에 대부분 매니시 룩으로 급선희하여 의외의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그의 디자인은 라이 프스타일에 기초하여 액티브하고 세련된 패션을 즐길 줄 아는 품위있는 여성을 표현한다.
그는 젊음과 대중성을 지향하며 디오르의 이미지를 토대로 하 여 단순하고 과장되지 않은 형태로 드레이프나 개더와 같은 디테일로 여성스러움을 표현하였으며, 화려한 직물을 사용하여 신선함과 생동감을 나 타내었다. 이처럼 그는 창시자의 기본 정신에 시대성을 더 하는 디자인으로 수십 년을 일관했다.
페레는 디오르의 정신을 그대로 호흡한 듯한 현대적인 우아한 아름다움을 컬렉션에 표현하였다. 페레의 디자인 특징은 구조적인 조형미가 특징으로 지적인 여성의 성숙미를 살리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커팅의 로댕'이라 불릴 정도로 완벽한 기술을 모토로 한다. 페레의 작품은 윤곽이 뚜렷하고 확신 에 차 있으며 힘있는 여성을 표현한다改 건축학적 개념을 토대로 힘, 현대적 감각, 실용성을 논리적으 로 결합시켰다.
페레의 디자인은 디오르의 엘레강스 에 지성미와 도회적인 세련미가 더불어 표현되었다. 그의 디자인 테크닉은 우아한 곡선적인 이 미지의 볼륨있는 형태, 부분적인 여밈이나 헴 라인 에서의 직선적인 언밸런스의 대담한 커팅선, 그래픽꽃무늬 등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직물과 동일계열 의 색채 혼합, 수공예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의 자수 와 레이스, 디테일, 트리밍을 사용하되 특히, 칼라나 상의부분의 디테일을 강조하며 리듬과 강조기법을 다시 전체 균형미로서 가다듬어 디오르 1세보다 더 복합적인 테크닉과 풍요함으로 디오르의 엘레강스 를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과감하고 파격적인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한층 젊어지고 세련된 디자인 을 선보이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갈리아노는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룩' 철학을 젊고 감각적으로 재해석하여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정통성을 유지 하며, 때로는 아방가르드하면서, 섹시하고, 현대적인 스타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이고 여성 적이면서 때로는 아방가르드하며, 혹은 유머러스하 기도 한 그의 스타일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전통적 인 이미지를 너무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비난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명품의 가치는 역사와 전통을 고수하며 창조자의 정신을 이어 가는 것뿐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과 창조 정신으로 동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트랜드를 재확립하는 것, 즉, 현실을 받 아들이고 이를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시키는 자세가 명품의 진정한 가치라는 점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고유 이미지를 잃지 않으면서도 디오르 메종을 젊고 생동감이 넘치게 재창조한 갈리 아노는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현재까지도 명품으로 서의 가치를 빛나게 한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디자인 테크닉을 살펴보면 드레 이프나 개더로 전체 형태가 아닌 부분적으로 볼륨감을 나타내고 비대칭, 비정형화된 스타일에 소매나 칼라를 과장하 거나 해체시키고 속옷을 겉옷으로 전이시키기도 한 다. 또한, 이질적인 소재를 조화시키기도 하지만 다 양한 색상 조화와 더불어 디오르의 우아함을 이질 소재로 나타내기도 한다. 레이스, 러플의 과다 장식은 여러 가지 조형 요소와 혼합되어 어우러 지고 비례, 리듬이 복합되어 있지만, 칼라나 목 부분 을 강조하거나 다양한 트리밍 요소 중 하나를 과장 하여 강조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맡았던 역대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엘레강스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Are clothes modern?’
패션 의상과 액세서리는 디자인 요소인지 아닌지, 또 이 새로운 뮤지엄에 패션을 포함할 것인지 아닌지 고민했다. 그는 패션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고, 디자인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지만 패션은 계속 바뀐다는 이유로 패션을 모마에 포함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 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복식의상과를 만들었다. 47년 그 당시에 품은 그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 쿠튀르에서는 그야말로 변치 않는 불멸의 디자인을 만들 수 있고 이미 만들고 있다. 루도프스키는 “패션은 의상이 몸의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라며, 의상의 불편함을 비판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언제나 변형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옛날이야기다. 그가 비판하던 패션은 지금 시대의 것이 아니다. 지금은 놀라운 테크놀로지 덕에 우리는 너무나도 편한 코르셋이나 더없이 가벼운 페티코트도 만들 수 있다. 볼륨이 크다고 무거울 필요가 없다.
이 흥미로운 오프닝과 피날레 룩을 통해 당신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나는 특히 사람들에게 패션을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인류 유산의 한 부분을 나타낸다는 점을 꼭 전하고 싶었다. 현재 옷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옷을 그저 심미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사람의 몸과 옷의 기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점 말이다. 그리고 패션이 디자인의 한 분야임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은 과거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예전의 코르셋은 건강에 좋지 않고 불편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다. 새로운 세대의 디자이너들은 사람의 몸과 옷의 기능성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디올의 상징은 8 과 별(조디악)인데8은 디오르가 좋아하던 숫자이며, 파리 8구에 있는 하우스 아틀리에를 8개로 고칠 만큼 좋아했다고 한다. 별은 디오르가 점성술과 미신을믿었었다고 한다.
갈리아노 사건으로 얼룩진 브랜드네임을 다시 빛내기 위해 디올 하우스는 라프 시몬스(Raf Simons)를 선택했다.벨기에 출신의 시몬스는 미니멀 디자인을 주로 선보여왔던 만큼 정갈하고 우아한 의상들을 내놓았고, 그다지 임팩트는 없었지만 갈리아노의 흔적을 지우는 목적은 달성했다. 그리고 2016년부터 현재까지 ‘발렌티노(Valentino)’에서 옮겨온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가 디자인을 맡고 있다.이렇듯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디올 브랜드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준 건 크리스찬 디올이 디자인 못지않게 사랑했던 꽃과 향기이다.
어린 시절 노르망디 지방의 해변도시 그랑빌의 저택에서 자란 크리스찬 디올은 넓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다, 자연을 담은 무늬, 꽃잎을 닮은 실루엣, 섬세한 꽃 장식 등. 그리고 그는 컬렉션의 의상들에 꽃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뉴 룩’으로 알려진 의상의 이름도 원래는 ‘꽃부리(Corolle)’였다.
향기가 룩을 완성한다고 믿었던 그는 1947년 첫 패션쇼를 준비하며 미리 사랑의 느낌을 담은 향을 의뢰했고, 발표 당일 부틱을 아름다운 꽃들과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날 첫 컬렉션과 함께 공개된 디올의 첫 향수는 그의 여동생을 상징하는 ‘미스 디올(Miss Dior)’로 이름 붙여졌다.
디자이너로 성공하며 여유를 찾은 그는 1951년 프랑스 남부 그라스 근처의 오래된 영지를 매입해 정원을 가꾸며 평화로운 휴식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곳은 세월이 흐른 뒤 현재 디올 하우스의 정원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새로운 향수의 탄생에 영감을 주는 동시에 향수의 주재료들을 키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