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수 있는 권리』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일하고 또 일하라, 사회적 부와 너 자신의 개인적 가난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라, 더 가난해지기 위해.
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일하라.
그러면 그만큼 더 비참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헤어 나올 길 없는 법칙이다.
(45쪽)
한국 사람은 일하기를 좋아한다. 일을 좋아한다기보다 쉬는 걸 잘 못한다는 편이 좋겠다. 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과거의 은퇴 연령이 현재는 애매한 연령이 돼 버린 것이다. 그 나이를 한결같이 ‘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나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이제 일 안하고 즐길 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을 하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해서만은 아닌 사람들도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봉사정신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즉 ‘돈’이란 매우 중요한 가치로 통한다. 가치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모든 가치는 ‘돈’으로 평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돈을 많이 받느냐 못 받느냐는 자신이 얼마나 존중받느냐 못 받느냐가 된다.
저자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면 그 노동은 공급 과잉을 불러오고, 그 공급 과잉은 곧 실직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노동자들이 열심히 수요를 맞추며, 그 수요를 위해 필요한 돈을 벌려고 또다시 일을 해야 하는 악순환을 지적한다. 물론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게으를 권리가 있다. 다만 발전은 포기해야 한다. 발전을 거부할 권리도 있다. 다만 우리 모두가 부르주아가 되거나 우리 모두가 ‘자연인’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칼 마르크스의 사위다. 사회주의는 이론상 매우 완벽했지만 결국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임이 이미 밝혀졌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이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