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의 「작은 벌」 vs 봉준호의 《미키17》
“단박에 알아봤어요. 중일 씨, 살기 싫은 거.”
아니다. 중일은 여태껏 살기 위해 일을 했고 잠을 잤고 밥을 먹었다. 아버지가 꼬박꼬박 밥상머리 앞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중일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살고 싶은 거랑 죽고 싶지 않은 건 다른 문제”란다. 그때서야 문득 자신이 사는 동안 한 번도 살고 싶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혹시 자신이 벌을 받는 걸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예소연의 단편 <작은 벌>의 이야기다. 사설구급대원으로 일하는 이중일은 직업적인 특성상 수많은 삶과 죽음, 또는 그 경계에 관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학창시절 때 친구에게 저지른 일로 인해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그런 삶을 학교 앞에서 팔던 메추리 신세 같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팔려나간 메추리들이 생명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알 리 없는 아이들의 손아귀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것처럼 진정희와 서송이의 병원 탈출 계획에 휘말려 그들의 납치 대상이 된 지금 자신의 처지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중일이 죽고 사는 것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들의 마음먹기에 달렸으며, 나쁜 마음을 먹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중일의 생명쯤은 그들에게 일말의 책임과 의무가 없는 일이다. 그것을 이중일은 자신에게 내려진 ‘작은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한 번도 버려진 적도 남겨진 적도 없이 오히려 버렸고, 떠나온 사람이었으며, 단지 살고 죽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메추리를 사서 굶길 대로 굶겨 옥상에서 떨어트린 적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럼으로 인해서 학창시절 이중일은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진지한 꿈을 들은 친구의 웃음에 허를 찔리곤 친구의 목을 조르고야 말았다. 생명을 호기심 정도로만 여겼던 자신의 반성이 위선인 것임이 하얀 속살로 드러난 순간이었을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라는 말이 있다. 반대로 ‘산지옥’이라는 말도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지만 동시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따라서 살고 싶다는 것과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것과 죽고 싶지는 않으니 산다는 것의 차이다. 전자가 훨씬 강렬한 삶의 욕구이며 애착을 의미한다. 인간은 욕구가 거세되었을 때 가장 고통스럽다. 결국 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할수록 삶은 ‘지옥’이다.
이중일이 일을 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면서 부지해온 삶은 살기 위해서라기보다 죽고 싶지 않았던 삶이다. 진정희와 서송이에 의해 죽음의 경계에 섰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러다가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살고 싶어’진다. 또한 그 순간이야말로 이중일에게 죽는다는 것은 벌이며, 드디어 삶은 욕구가 된다.
봉준호가 그린 <미키17>의 미키는 밥 먹듯 죽는 인간이다. 죽은 인간이 또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니 그냥 인간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고, 복제인간이라고 밝혀야겠다. 아무리 복제된(복제되는) 인간이라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니 미키 역시 살고 싶거나 죽고 싶지 않거나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는 일에 개입하게 된 계기 역시 살기 위해서였다. 바꿔 말하자면 미키는 죽어야 사는 인간이다. 그런 미키에게 삶은 ‘지옥’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일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새롭게 재생되는 삶이 고통일까, 온갖 방법으로 죽는 게 고통일까?
살아가는 일에, 혹은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모르고 무덤덤해질 수 있듯 미키는 죽는 일에도 무덤덤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미키가 하는 모든 행위가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결론적으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래 사는 것이 벌이라고 생각해왔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지만, 길어진 그 삶의 시간을 길어지지 않았던 시간만큼 값지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까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수명만 길어졌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래 살기를 열망하고, 여전히 영생을 꿈꾼다.
가까이서 지켜본 죽음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경험을 하고 살아온 나는, 죽음 앞에서 강렬해지는 삶의 의지를 종종 보아왔다. 동시에 죽음의 문턱을 다녀온 사람이 삶에 경건해지는 자세도 자주 보아왔다. 살아간다는 것은 대체로 멋진 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삶으로 인한 고통은 죽음에 비하면 고통도 아니다. 주어진 남은 삶을 죗값으로 여기며 살지 즐겁게 개똥밭을 구른다고 여기며 살지는 이제부터 마음먹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