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사랑스럽다.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그림들은 이런 그림이겠구나 싶다. 막 해가 지고 난 저녁, 소녀들이 정원에 종이 등을 밝히고 있다. 두 소녀 모두 짧은 단발에 어두운 갈색 머리다. 꽃잎처럼 너울 거리는 커다란 주름이 잡힌 흰 면 드레스와 검은색 스타킹까지도 사랑스러움을 완성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소녀들을 둘러싼 백합과 카네이션 그리고 장미를 보고 있노라면 짙은 꽃내음이 밀려올 듯도 하다. 하루 중 해가 막 진 이 시간대를 프랑스어에서는'블루아워'라고 부른다. 또 다른 명칭은 매직아워. 이 시간대 하늘은 완전히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 해가 꼴깍 넘어간 직후. 어느새 푸르스름한 빛이 세상을 덮었나 싶으면 곧이어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등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여러 색깔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곤 사라진다. 하늘빛이 땅위의 모든 색을 압도하는 이 시간은 그 빛들을 바라만 봐도 특별한 의미 부여하게 되는 매직아워다. 이 시간 대 여름꽃 향기는 더욱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니, 만물이 민감해지고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시간대인 것 같다.
나 또한 이 블루아워를 사랑한다. 내 삶의 인상적이었던 블루아워가 그때의 감정과 함께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 아닌 맞벌이 부부였는데, 6시쯤 퇴근할 엄마를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500원을 내고 방방이를 신나게 타다 보면 친구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다. 아직 엄마가 집에 오지 않은 나는 엄마의 퇴근을 기다린다. 방방이에서 내려 두 발로 내딛고 있는 땅이 꿀렁대며 움직이는 것 같다. 어질어질한 상태로 길가에 한 동안 앉아 해가 넘어가는 그 순간의 적막함과 하늘색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따뜻하면서도 외로웠던 하늘 빛이었다.
대학을 떨어지고 나서는 재수학원에 다녔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가서 OT에 MT에 미팅에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학원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좋아하는 가수 테이프를 샀다. 웃기지만 고생하는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호기로 의대만 지원해서 우수수 대학에 떨어졌는지, 엄마도 나도 참 현실 감각이 없었다. 재수 학원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업을 했는데, 저녁을 먹고 자판기 믹스커피한 잔 뽑아 들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학원 옥상에서 하늘을 보았던 것도 이 시간대였다. 길고 긴 터널 같은 재수생의 기간이 과연 끝은 날까, 끝도 없는 불안의 회오리 속에서도 나를 다시 잡아 일으켰던 시간들이 기억이 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할 법도 한 내 성격도 한 층 까칠해져 갔다. 어김없이 저녁밥을 먹고 당연한 듯 회사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며 보았던 을지로 빌딩 숲 사이 붉은 노을과 푸르스름 한 하늘의 풍경은 지금 와서는 좀 그립기도 하다. 이제는 집에 들어갈 생각 없는 아이들을 놀이터에서 한 없이 기다리며 종종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난 집밥 냄새가 함께 어우러져 아이들을 재촉하는 내 목소리와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