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내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자유’는
언제부턴가 다수의 의견 안에서만 허락된다.
다수의 눈에 어긋나면,
그 자유는 순식간에 ‘무례’가 된다.
정의로운 소수와 악의를 가진 다수가 있다면,
그 순간부터 정의는 다수의 것이 된다.
결국 정의조차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대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회.
세 명이 같은 생각을 가지면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세 명이 한 사람을 바보라 하면
그 사람은 바보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남들이 하는 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다름’을 용기라 부르지 않고,
‘이상함’이라 조롱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은
다수의 동의로 결정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는
남을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존중받아야 하고,
존중은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존중은 상대의 말을 듣는 일이며,
그 말이 나와 다르더라도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다.
요즘 세상은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지 못한다.
다름을 불편해하고,
불편함을 틀림으로 단정 짓는다.
그리곤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몰아세운다.
인권은 존중받고 싶으면서,
정작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모두가 주체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은
타인에게 넘겨준다.
눈치 보고, 분위기를 살피고,
다수의 흐름에 몸을 싣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간다.
누가 보아도 올바른 길,
누가 보아도 안전한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진정 내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를 존중해야 한다.
스스로의 생각을 믿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
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바로 존중의 시작이다.
존중은 결코 침묵이 아니다.
맞지 않다고 느낄 때,
그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
타인의 동의가 없어도
자기 확신을 지킬 수 있는 것.
그게 진짜 존중이다.
우리는 종종 ‘배려’를 존중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배려는 감정이고,
존중은 태도다.
배려는 상황에 따라 변하지만,
존중은 원칙이다.
상대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나는 그를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
그가 나와 다르더라도,
존재의 가치를 부정해선 안 된다.
세상은 점점 더
‘객관식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정답이 아닌 것은 오답이 되고,
오답을 고집하는 이는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다.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각자의 주관식으로 써야 한다.
누가 채점하든 틀리지 않은,
나만의 문장으로 살아가야 한다.
존중이란
남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해는 동의와 다르다.
존중은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모두가 각자의 인생을 살고,
각자의 답을 써 내려간다.
그 답이 다르다고 해서
누군가의 삶을 오답이라 부를 수는 없다.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하지만,
존중은 언제나 느리게 도착한다.
그래서 더 귀하고, 더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자신과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여긴다.
그러나 부디 기억했으면 한다.
존중은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지막 남은 도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