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르네.
이 말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면서도 슬픈 말이다.
내가 바라던 건 단순한 공감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랐다.”
그 한 문장 안에는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쌓여 있다.
상대는 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맞는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백 번 옳은 말이다.
하지만 감정은 늘 논리를 앞서간다.
내가 원한 건 ‘논리적인 대화’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결을 알아주는 눈빛 하나였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 표정의 미묘한 떨림을 읽고,
내 목소리의 속도를 느끼며,
“오늘은 뭔가 다르네”라고
조용히 말해주길 바랐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그게 진짜 유대 아닐까.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다른 이들의 마음을
그렇게 알아차려 본 적이 있었을까.
혼자 살기 전에는
화장실에 들어가기만 해도
깨끗하게 개어둔 수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방 서랍 속엔
늘 정리된 속옷이 들어 있었다.
식탁 위엔 언제나 따뜻한 반찬이 놓였다.
그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손끝과 시간에서 나온 결과였는데,
그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혼자 살고 나서야 깨닫는다.
세탁기를 돌리고,
물을 끓이고,
하루 세 번 밥을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귀찮고,
얼마나 정성이 필요한 일인지.
그제야 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당연한 일”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는지를.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게 단 한 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너는 내 마음도 몰라주니.”
그저 묵묵히,
말없이 나를 위해 세상을 정리해 주셨다.
그 침묵이 곧 사랑이었다.
그제야 알게 된다.
선의란,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행위가 아니다.
선의는 계산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것이다.
그 마음이 언젠가 닿는다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알아달라’는 마음이 빠지는 순간,
비로소 진심이 된다.
그래서 선의는 언제나 조용하다.
눈에 띄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그건 마치 공기 같다.
숨 쉬며 느끼지만,
의식하지 않아도 늘 우리 곁에 있는 것.
요즘 세상은 너무 똑똑하다.
누구나 모든 걸 안다.
뉴스를 켜면 ‘분석’이 넘치고,
인터넷을 열면 ‘정답’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빠른 판단’을 좋아한다.
문제는, 판단이 빠를수록
감정은 느려진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말들이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정확한 판단이
누군가의 온기를 앗아간다.
그럴 때마다 문득 생각한다.
“나는 더 멍청해지고 싶다.”
멍청해진다는 건,
모르는 것을 모른 채로 두는 용기다.
이 세상은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모두가 ‘아는 척’을 하며 산다.
하지만 나는 이제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기준이 바뀐다.
어제의 상식이 오늘의 구식이 되고,
어제의 믿음이 오늘의 오류가 된다.
사람들은 점점 ‘업데이트된 인간’을 원한다.
더 빨리 이해하고,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진짜 이해는 줄어든다.
사람의 마음은 업데이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의 인간은
운명론 속에 살았다.
불행이 오면 신을 탓했다.
“신이 나를 버렸다.”
그 말에는 책임보다 체념이,
분노보다 겸허함이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깨달았다.
신은 없다.
운명은 스스로 만든다.
이성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간은 불행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일엔 ‘원인’이 있어야 했다.
모든 상처엔 ‘가해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불행의 이유를 찾는 대신
누군가를 탓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불행의 책임자’가 되어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더 멍청해지고 싶다.
더 이상 원인을 찾지 않고,
누구의 잘못도 묻지 않으며,
그냥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살아보고 싶다.
나는 더 멍청해져서
감정의 복잡한 이름을 버리고,
그저 단순하게 느끼고 싶다.
햇살이 좋으면
그저 따뜻하다고 말하고,
비가 오면
조용히 젖으며 걸어가고,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도
그 마음에도 이유가 있겠지,
하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똑똑한 사람은 늘 이유를 찾는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그 사람의 행동 뒤엔 어떤 심리가 있었는지.”
하지만 삶은
모든 걸 분석할 만큼 길지 않다.
멍청함이란,
때로 세상을 온전히 느끼기 위한
감정의 공간이다.
나는 더 멍청해져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눈을 뜨면 펼쳐지는 언덕에 누워,
오늘의 날씨를 준 햇빛에 감사하고,
그늘을 만들어주는 구름에게 고맙고,
숨 쉴 수 있는 바람에게 인사하며,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멍청함이라면
차라리 평생 짊어지고 싶다.
지혜는 세상을 멀리서 보게 만들지만,
멍청함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지혜는 옳고 그름을 가르지만,
멍청함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음’에 의미를 둔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런 멍청함은 오히려
가장 귀한 지혜다.
세상은 너무 많은 지식과 언어로
복잡해졌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말하고,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더 멍청해지고 싶다.”
모두가 아는 세상에서
나는 조금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르는 게 많을수록
세상은 새롭게 다가오니까.
멍청하다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배움의 여지를 남겨둔 태도다.
나는 더 멍청해져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보고 싶다.
결과보다 마음을 먼저 보고 싶다.
세상은 오늘도
똑똑한 사람들의 말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분석하고,
누군가는 증명하며,
누군가는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더 멍청해지고 싶다.”
그 말속엔
포기나 체념이 없다.
그건 오히려
이해를 넘어선 평온에 대한 선언이다.
모든 걸 알지 않아도 괜찮고,
모든 걸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오늘을 온전히 느끼는 일.
그게 내가 바라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