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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파랑새 Mar 29. 2023

아빠의 설교

꼰대아빠 취중 설교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

딸과 대화의 계기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가져다준 '선물'같은 것이다.

일부러 대화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의도적으로 만들어도 딸이 흔쾌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

대부분 흔쾌한 경우는 드물다.

서로 사는 시간이, 역사가,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딸 입장에서는 아빠와의 대화가 덜 재밌을 것이다.


재미의 힘.

그것은 시간, 역사, 세계를 초월다.

그만큼 딸이 흔쾌하게 나서주는 대화의 시간을 갖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딸과 대화의 시간은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것도 감사한데,

소위 '설교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신의 선물이다.




2023년 3월 29일 새벽.

그 시간이 주어졌다.

동네 주점에서 가볍게 밤마실을 보내고 집에 들어왔다.

들어와서 '안녕'하고 쉬는데, 

딸이 일상의 대화를 걸어왔다.

나는 '딸 대단해!'라고 칭찬했다.

나의 진정성인지, 술김에 '칭찬 남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규명하려면 '청문회'가 필요할지도.

어쨌든 딸이 말을 걸어왔다.


딸이 얼마 전 국어과 모의고사 시험에서 꽤 잘했다.

내 기준에서 잘했다.

그것을 칭찬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했다.

딸이 내게로 와서 말을 시작했다.

딸과의 대화!

아빠의 칭찬이 좋았나 보다.

심지어, 나의 말에 '경청의 태도'를 취했다.


'오케이. 올 것이 왔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설교 시작.

아빠의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보통, 딸에게 설교할 때는

차로 어딘가 이동할 때노린다.

그때는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 듣곤 한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고.

그 마저도, 지금은 쉽지 않다.

차에 타면 딸은 에어팟, 그전에는 헤드셋을 끼고, 자기 음악을 듣는다.


그렇게 딸과의 대화의 시간은 좁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날, 오늘, 이게 웬 떡.

 

'딸이 나에게로 다가오다니!'


하여,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딸!"


"들어봐."


"아빠는 공부란 이렇게 생각해. 네가 국어과를 잘해서 고마워. 아빠가 너의 국어과 실력을 보니, 이제 내가 '설교'를 해도 될 것 같아. 아빠는 공부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 과목 점수 잘 맞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그런데 아빠가 생각하는 공부는 1순위, 2순위가 있어."


"1순위는 건강, 체력이야. 결국 몸이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것이야.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몸이 아니야. 네가 스스로 만들고 싶은 몸이야. 가장 건강하고,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해."


"그다음은 생각하는 공부야. 몸이 만들어지면 그다음은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해. 그것은 가능한 독서를 통해서 되는 것이겠지. 체험을 통해서도 좋다고 생각해."


최근에 딸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어떤 동아리 활동에 관심을 갖고 지원했다.

동아리 활동에 대해 그전에도 지나가는 말로 나의 의견을 묻고 했다.

나는 좋다고 했다.


딸은 동아리 활동에 흥미가 있어 보였고, 나는 그것을 공부와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에 기록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살짝, 취기를 빌어서 딸에게 설교했지만, 딸은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리고 어떤 책(아빠의 책) 한 권을 자기 방으로 가져갔다.

나름 진지하게 자기만의 공부의 시간을 가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능하면 재밌게,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갔으면 좋겠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리버럴리즘'의 경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부도 그런 자유주의적인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제도권 공부이든, 아니면 비제도권이나, 비전형적인 공부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해가면,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대략 한 시간 정도 '대화'를 한 것 같다.

나만의 일방적 대화를 한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에 딸도 질문도 하고, 나의 말에 피드백도 주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절대량은 내가 많았다.

결국 '설교'가 돼버렸다.


잘 들어준 딸이 고맙다.

경청의 느낌을 받았다.

자러 들어간 딸의 태도에 고마워서, 나는 '취중노트'로 딸과의 시간을 기록한다.


"꽁냥꽁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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