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들에게 보내는 어떤 어른의 ‘변명’

수능 보는 딸을 위한 응원과 변명

by 걷는파랑새

올해 대입 수능일은 11월 13일입니다.
제 딸도 이번에 수능을 봅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10일 후면 수능이 있네요.
수능을 보는 딸을 응원해야겠지요. 함께 수능을 보는 대한민국 고3 학생들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수험생 딸과 수험생들을 응원하는데 가슴 한 구석은 흔쾌하지가 않습니다. 어른으로서 의문이고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것 때문입니다. 정확한 감정은 ‘불만’과 ‘미안함’입니다.
학생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므로 미안함은 그들을 향한 감정입니다.
불만은 어른들의 책임에 대한 부분입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것일까요.
불만의 근원은 ‘왜 수능을 봐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자, 문제제기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수능이 아닌 고등학교 ‘졸업시험’이면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학입시는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 대학이 필요한 방식으로 선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수능 성적을 기준으로 대학을 선택하는 방식이 많은 왜곡과 문제점을 낳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 과도한 입시 경쟁, 사교육의 문제, 쉴 틈 없는 학생들의 생활 등등.
그럼에도 수능과 같은 대학입시 제도가 주는 이점이 있기에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이 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수능과 함께 고등학교 교육 활동 결과를 반영하여 대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수시제도’ 등 입시 전형을 다양화하고 보완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능을 유지하면서 나머지를 보완하는 방식이므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능의 난이도를 놓고 수험생과 학부모, 교사나 학원계 등 이해관계자들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만 봐도 그러합니다. 수능 점수로 행복해야 할 중고등학교의 삶이 평가되고 결정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점수화하는 평가 방식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평가하고,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저는 수능과 같은 대학 선발 방식이 유지되는 한, 초중고 교육과정이 정상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기존 수능 체계에서, 기존 교육체계에서 교육과정을 다양화해서 학생들의 건강성과 창의성을 키운다고 하지만, 수능 입시라는 무언의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여러 형태와 방식으로 아이들을 입시의 틀 안에 가두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때론,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고 학교에 다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꼭 사춘기 탓이 아니어도, 한 번쯤은 ‘왜 학교를 다녀야 해. 왜 수능을 봐야 해. 왜 그런 공부를 해야 해!’ 하는 식으로 불만이나 반항을 드러낼 만도 한데, 조용하게 통과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고맙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합니다. 저는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속이 편하니까요. 물론 아이도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요. 영화 제목처럼 ‘어쩔수가없네’요.

그런데 딸의 생활들을 지켜볼 때면 미안하고 불편합니다. 아이가 학교생활을, 청소년 시절을 건강하게 보내고 있는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과 불편함입니다. 그 의문과 불편함, 미안함의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수능이라는 입시제도라고 저는 의심합니다. 학생으로서 수고(노력)하는 방식이 꼭 수능과 같은 입시를 위한 공부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한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능력을 키우고 성장을 위한 여러 경험을 해갈 수 있을 테니까요. 왜 그런 기회나 경험들을 뒤로하고, 입시의 틀에 맞춰진 공부를 해가야 하는 것일까요. 학교나 학원을 오가는 과정에서 아이의 건강은 얼마나 훼손될까요. 얼마나 중요한 성장기입니까. 입시에 ‘국한된’ 교육과정은 학생과 학생들의 관계를,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를, 교사와 학부모들의 관계를, 학생과 학부모의 관계를, 그 외에도 파생되는 여러 사회적 관계들을 얼마나 왜곡시키고 있을까요.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과 꿈을 찾고 키워가기에 적합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건강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소양을 키워가고 있을까요. 선생님들은 교사로서 소명을 유지하며 교육 활동의 보람을 느끼고 있을까요. 해묵은 의문과 질문들입니다.

수능과 같은 대학입시가 없다면 우리 아이들의 생활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교사들의 학습지도 방식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고, 더 창의적이며, 삶을 더 낙관하고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 아닌, 더 많은 신뢰를 쌓고 배우며 다양한 삶의 기술을 배우지 않을까요.
또 이런 상상은 어떤가요.
고등학교 졸업시험만 보면 된다고.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직업학교에 가서 네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도 된다고. 혹은 대학을 가더라도 대학의 서열을 묻거나 따지지 않아도 된다고. 대학이나 전공 선택에서 너의 흥미나 적성, 꿈을 쫓아가면 된다고. 대학 공부를 선택한 너에 대해 국가가 지원할 테니 너는 대학 등록금과 같은 비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다면 아이들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적성과 미래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 책임감 있는 청년으로,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입시생도 아니고, 학생도 아닙니다. 교육 분야 종사자나 전문가도 아닙니다. 저는 요즘 학생들의 학교생활도 잘 모르고, 수능이나 입시제도, 대학 선발의 여러 제도들도 잘 모릅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갖고 어떤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저는 그저 수험생 딸을 둔 학부모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저도 큰 틀에서는 수능이나 입시제도가 갖는 복잡성을 모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변하지 않은 채, 수능과 같은 대학입시 제도나 대학 서열화를 없애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현실론’도 모르지 않습니다. 교육 과정이나 대학 선발 과정에서 경쟁과 서열 세우기의 불가피성을 모르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능력이 천차만별인데, 이를 묵인하고 하향평준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된다는 점도 모르지 않습니다. 현재의 입시제도와 여러 보완체계를 유지하고 지지하는 온갖 논리와 이점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맘때쯤이면 길거리 여기저기에서 수험생을 응원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길거리 현수막들을 봅니다. 저는 조금 불편합니다. 어른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험생들을 당연하게 응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어른들의 책임으로부터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어른들의 책임은 청소년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고 지켜주며 그들의 성장을 응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 교육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서 아이들이 좀 더 자유롭고 공정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이렇게라도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이 글은 아이들에 대한 ‘변명’의 글입니다. 그동안 아이를 지켜보면서 ‘어쩔수가없다’는 이유로 미안했던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스스로 합리화했던 것들에 대해서 면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면책’을 받고자 함입니다.

여기에 더해 하나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인공지능(AI) 시대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미래이며, 이미 도래한 현실 말입니다. 하필이면, 우리 아이들 앞에서 이런 미래가 펼쳐지고 있을까요. 기회를 찾아서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도 그 미래를 잘 모르니까요.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할 미래라는 것은 부인할 수도 없지만, 그동안 아이가 겪어 온 ‘공부의 과거 혹은 현재’와 앞으로 개척해 가야 할 수능 넘어 대학 또는 사회에서 부딪칠 ‘공부의 미래’는 그 ‘격차’가 너무 크지 않을까요. 계속 수능과 같은 입시 제도를 붙들어야 할까요? 공부의 미래에 필요한 청소년기의 공부에 대해서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는 딸과 수험생들을 응원합니다. 인생이라는 길에는 입시제도의 경쟁과 서열화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꿈과 개성을 찾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해 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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