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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이야기

23년 여름의 선물

by 고요


'꿈' 이야기를 하자면, 2023년의 여름을 생각합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준비하던 일이 어그러진 여름이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한 달의 기다림이 또 생겨버렸습니다. 몇 년도 잘 기다렸는데, 고작 한달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소식을 듣고 더 걷지도 못한 채 카페에 들어가 가장 단 코코아를 시켰습니다. 그러곤 한참을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난 후 코코아를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혼자 여행이나 갔다오자'



바로 핸드폰을 켜서 일본 다카마쓰 행 비행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계획을 세웠지요. 사실 다카마쓰는 두달 전 시부모님과 여행을 다녀 온 곳입니다. 이번엔 지난번에 가지 못했던 곳 위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다음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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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신비한 매력이 있습니다.

공항에 있는 것 만으로 일종의 해방감을 느낍니다. 익숙했던 것, 지쳤던 것, 피하고 싶었던 것들로부터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인가봐요.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만으로 이미 '낙원'을 경험했으니 괜찮습니다. 그곳에 낙원이 없음을 깨닫고 돌아와, 다시 나의 삶을 살면 될거예요.



제가 주로 머물렀던 곳은 일본 '카가와 현'의 '쇼도시마'라는 섬입니다.

일정이 촉박하게 숙소를 예약하다보니 교통이 매우 불편한 시골의 한 가정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여자 혼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교통도 불편한 곳에 3박 4일을 머물러야했기에 가기 전날까지도 취소를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될대로 되라 여행이었기에 그냥 나를 던져보기로 합니다.



호스트는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한 부부였습니다. 다행히 인상이 매우 좋아보였어요.

새벽에 일찍 나와 일본의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긴장하며 고된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결국 그날 밤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먹은 것들이 모두 얹혀서 토하고 속이 너무 좋지 않았어요.

호스트에게 번역기를 돌려가며 약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호스트는 차를 타고 나가 약과 이온음료를 사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죽을 끓여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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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몸도 마음도 꽤나 회복했습니다.

쇼도시마에는 관광지들이 많았지만, 딱히 가고 싶진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빌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느리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호스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곳은 밥집을 찾는게 어려우니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읍시다'

뜻밖의 초대에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응했습니다. 그리고 호스트의 카페로 갔습니다.



호스트는 동네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가옥을 손으로 직접 고치고 지역에서 난 농산물로 음료와 디저트를 만들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호스트 카페의 운영시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업시간 수,목,금,토/ 12:00-16:30'



'도대체 이 사람들은 뭘로 돈을 벌지?'

호기심을 가득 안고 안으로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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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도시마의 특산물 소면과, 간장소스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다음날엔 오코노미아끼를 대접 받았어요.

이틀간 저녁을 대접받으며 많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5살 꼬마 아이는 유치원에 다녀온 후 카페를 휘저으며 놀이를 즐깁니다.



호스트 가족의 얼굴은 느리고 평안해보였습니다.

일본사람 특유의 예절이 몸에 베어있었고, 음식을 만들고 건네는 손길 하나가 다정했습니다.

찰나였지만, 그들의 삶이 제 마음에 들어 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후 고마운 마음에 한국 과자와 장난감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훨씬 지난 1월의 어느날, 일본으로부터 소포가 하나 왔습니다. 직접 만든 '슈톨렌과 엽서'가 있었어요.

인스타를 통해 그들의 소식을 가끔씩 접합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화덕을 만들어 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디저트 클래스도 운영합니다.

카페가 쉬는 날엔 음악가를 초대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음악회를 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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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여행 일정을 소화하느라 그들의 카페에 잠시밖에 머물지 못한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모든 순간을 통틀어 그 잠깐의 시간이 가장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정한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사람들이 찾아와 각자만의 쉼을 얻습니다. 그 공간은 느리게 흘러가지만, 생기가 넘칩니다. 어느날엔 공동체와 함께 음식을 나누고, 삶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끔씩 족구나 피구 같은 운동을 같이 합니다. 진 팀이 설거지와 청소를 합니다. 아이들은 망아지마냥 이리저리 뛰어놉니다.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는 시간도 갖습니다. 순간을 오롯이 살아가며, 주어진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미 충분합니다.


마음속에 그림은 점점 선명해져, 현실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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