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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빡치게 하는 것들

가시는 가까이 있을 때 찔리는 법이지

by 고요

나를 빡치게 하는 것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를 빡치게 하는 것들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가까이에 있다.

어릴 때는 주로 엄마였다. 나는 밖에만 나가면 밝고 명랑했다. 특히 교회에서는 싹싹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엄마는 뭇 성도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쩜 그렇게 밝고 싹싹하냐는 말에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쟤는 밖에서만 그래요. 집에서는 얼마나 쌀쌀맞은대요."

엄마의 그 말이 지금은 몹시 서운하다는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밖에서라도 싹싹하게 어디여'

집에서도 무뚝뚝하고 밖에서도 무뚝뚝한 것보단, 하나라도 밝고 명랑한게 낫지 않나?

사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엄마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건 아니다. 교회에서 밝게 인사하고 싹싹하게 어른들 대하는 모습을 보면 집에서도 그렇게 해주리라 기대할 것 같다. 특히 아기를 낳고 보니 나중에 내 아들이 밖에서 다른 어른들한테는 상냥하게 잘 하는데, 집에 와서 무뚝뚝하게 말도 안하고 문 닫고 들어가버리면 몹시 서운하고 우울할 것 같다.

엄마가 나에게 그런 기대를 품었듯 나도 엄마에게 기대를 품었다. 나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 줄 거라고. 나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고 사랑을 많이 표현해 줄 거라고. 하지만, 엄마는 6남매의 막내여서 그런지(그 옛날 자식 많은 집 막내들은 오히려 사랑받지 못하고 컸다는 걸 엄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사랑 표현은 술이 들어갔을 때 아주 과해진다. 과유불급. 과한 사랑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아직도 기억남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바구니에 귤을 담아 놓고 까먹곤 했는데, 엄마가 귤을 집더니 이건 너무 못생겼다며 나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물론 장난이란걸 알지만 어떻게 엄마가 자식에게 못생긴 귤을 줄 수가 있나?라는 생각에 무척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막내여서 그런지 사랑을 주는 것보다 받는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도 나를 빡치게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엄마 때문이었다. 물론 엄마는 이미 우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고 넘치는 사랑을 주었지만, 내 안의 어린 아이는 여전히 엄마 사랑이 고픈가보다. 결혼을 하고 나니 엄마와 거리를 둘 수 있어 참 좋았다. 우선 엄마를 자주 못보니 애틋한 감정이 생기기까지 했다. 우리 사이엔 약간의 거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결혼 이후 나를 빡치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남편과의 갈등이다. 특히 아기가 태어나면서 남편이 자주 아팠다. 처음 한두번은 아기를 돌보면서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호했지만 얼마 안있어 또 아픈 남편을 보는데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남편에게 육아는 팀플레이인데 이렇게 아프면 어떡하냐며 하소연을 했다.

우리 남편만 이렇게 자주 아픈 것인가 몹시 우울하던 찰나 엄마들과 대화를 하는데, 다른 남편들도 자주 아프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남편들은 이토록 자주 아픈 것인가!!!! 엄마들은 아픈 기미만 보이면, 돌봐야 할 아기 생각에 바로 관리모드로 들어가는 반면, 남편들은 너무 안일한 것 같다.

요즘 아기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결국 감기에 걸렸다. 아기가 감기에 걸리면 온 가족이 다 걸린다고 봐야한다. 결국 남편도 감기에 걸렸는데, 그 전날까지 속이 안좋아 이틀간 음식을 조절해 준 상태였다. 그런데 감기까지 걸린 것이다. 너무 빡쳐서 그만좀 해라 쫌!!! 이라며 사자후를 날려버렸다. 남편은 이제 아프기만 하면 바로 약을 때려 넣고, 병원에 달려간다. 이제야 좀 육아는 팀플이라는 말을 몸소 깨달은 것 같다. 그래도 남편이 아픈게 안쓰럽다가도 너무 빡친다. 솔직히 안쓰러운 건 잠깐이고 빡침이 더 길다. 아빠들이여! 정신좀 차리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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