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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phile Dec 30. 2021

[영화 칼럼] - 패터슨

내일이 기다리는 거리의 시인들에게

Paterson, 2016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극장에서 '천국보다 낯선'을 관람하고 난 직후 어느새 '짐 자무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내가 떠오른다. 고다르와 야스지로, 그리고 브레송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영화에서는 누벨바그가 남긴 잔향과 야스지로의 고독함, 그리고 그가 가진 뉴욕 인디 시네마의 쌉싸름하지만 깃털 같은 향기가 겉돈다. 주 영화의 중력이 서사가 아닌 일상의 반복성인 그의 영화들은 종장과 가까워질수록 예술성이 날개를 펴가는 듯한 작품들이 많다. 여태까지 짐 자무시라는 이름을 들으면 '천국보다 낯선'이 떠오르거나 그냥 커피와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사람들이 '패터슨'을 본다면, 이제는 이 영화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수도 있다. '패터슨'은 짐 자무시의 14번째 영화이자 그의 영화 중 가장 시적인 영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형식이나 구조 자체가 8연의 시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연출의 호흡도 일정한 리듬을 유지한 채 (한정적인) 패터슨이라는 도시를 유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개봉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는, 곧 새해가 될 무렵, 이 영화의 힘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반복'이라는 지독한 순환 속 희미한 한 줄기의 빛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짐 자무시는 이 영화를 통해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르는 등 배우 아담 드라이버의 탁월한 연기를 훌륭한 연출로 담아냈다. (칸느 영화제의 성격상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이 더 적절했던 것 같기는 하다.)


버스를 운행하는 패터슨

패터슨에서 '버스 기사'라는 직종은 하나의 제유로서, 즉 일상 속 예술을 행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환기하는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작용된다. 이 영화에서 직종이라는 키워드는 '패터슨'이라는 인물의 즉자적인 시인으로서의 삶과, 함께 공존하는 도시 '패터슨'에서의 버스 기사라는 삶을 상생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의사이자 동시에 시인이었다는 과거의 지점을 한 번 정차한 뒤에 시의 종장에 이른다. 하지만 아름다운 시들을 뒤로 우리는 한 예술가의 광막한 공허와 마주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두 삶의 양극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괴리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짐 자무시는 흑과 백, 그리고 쌍둥이라는 장치를 끌어들임으로써, 현실과 시의 세계, 시인과 버스 기사의 삶, 그리고 시를 향한 사랑과 아내에 대한 사랑을 시의 방식으로 점철하며 영화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양분화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듯하다. 그리고 또한 '버스 기사'라는 모티브는 짐 자무시가 '예술가'를 대하는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첫째적으로 누구나 대형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면허만 딴다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지점에서 예술가라는 위치를 '도달'이 아닌 '결정'의 관념으로 본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직종으로 따지면 패터슨은 반복적 노동이라는 보편적인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직장인이자, 대단한 직종(영화는 계속해서 패터슨에 살던 과거 위인들을 조명한다)을 가진 인물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평범한 '버스 기사' 없이는, 사람들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없다, (적어도 차가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버스를 탈 필요가 없다.) 즉 예술이라는 하나의 매체이자 문화적 언어는 필요한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권리라고 볼 수 있고, 그 권리는 버스를 타는 시민들이라는 대상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근데 굳이 외부적인 대상이 있어야만 예술이 존재하는가?: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패터슨이 쓰는 시의 목적이자 대상은 아내도, 세상도 아닌, 지극히 자기 자신이라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가 쓰는 시들에 영감에는 그가 운행하는 버스 뒷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승객들의 언어 또한 포함된다. 감독은 패터슨이 시를 쓰거나 영감이 떠오를 때 특정 영화 기법을 사용하는데, 그는 Superimposition을 통해 패터슨이라는 인물의 시적 호흡과, 현실의 숨결의 융화를 실재(實在)의 장소와, 상상의 이미지(혹은 기억의 이미지)를 겹침으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버스 안에서 승객들 간의 대화를 들을 때 줄곧 등장한다.

Superimposition 된 두 이미지


패터슨의 아내는 그에게 시를 복사해놓으라고 당부를 하며, 주말에는 그 일을 수행하기로 약속까지 받아낸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패터슨은 그의 시를 복사하고 싶지 않은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쓰는 시의 대상은 오직 자기 자신일뿐더러, 그(짐 자무시)가 믿는 예술의 독립성, 또는 유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짐 자무시는 이런 패터슨(그)의 신념을 영화 서두에 암시한다. 패터슨과 그의 아내 로라는 첫째 날 월요일에 잠에서 깨어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짐 자무시는 이 대화마저 아주 능률적으로 활용한다. 대사는 이렇다:

 

로라: "나 아름다운 꿈을 꿨어." "우리한텐 아이가 둘이야." "쌍둥이."

"아이가 생기면 쌍둥이가 좋을 것 같아?"


패터슨: "좋지... 쌍둥이." "왜 안 좋겠어?" "당신이랑 나랑 한 명씩."


이 짧은 대사 안에 감독은 로라라는 인물은 '꿈'이라는 이상적 세상을 살고자 하는 인물인 반면, 패터슨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임을 조명한다(대화 이후 패터슨은 근무를 하기 위해 현실의 세계로 나가지만, 로라는 다시 잠에 든다). 하지만 이 두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다름 아닌 "당신이랑 나랑 한 명씩"이다. 이 대화에서 '자녀'라는 문맥은 패터슨이 창조해낸 '시'와 결부되고, 로라가 추구하는 '우리'와 패터슨이 말하는 '당신과 나, 한 명씩'이라는 문맥은 패터슨이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점철된다. 그가 복사를 꺼려하는 이유는 그의 시를 복사하는 행위 자체가 곧 그의 작품의 유일성과 창작자(시인)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예술가로서 작품을 지키고자 하는 일종의 도해(蹈海)는 결국 우울한 끝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관객들이 마주하는 예술의 역설은, 과연 패터슨의 지조는 그의 작품을 고결히 지킨 것인가?이다. 그 이유는 그가 복사하기를 약속한 채 복사를 했더라도 그의 '비밀 노트'에 담긴 '유일한' 시 들은 어김없이 찢어졌을 테니 말이다.

일본인 시인과의 대화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마지막에 일본인 시인을 만나는 장면일 것 같다. 패터슨에게 빈 공책이라는 '텅 빈 페이지의 가능성'을 선물 한 뒤 떠나기 전 그가 "아하"라고 말할 때, 패터슨은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혼잣말로 "아하"를 속삭인 뒤, 주머니에 있던 팬을 꺼내 다시금 그의 '첫' 시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The Line                                                                    한 소절


There's an old song                                                흘러간 노래가 있다

my grandfather used to sing                                 할아버지가 흥얼거리시던 노래

that has the question,                                            이런 질문이 나온다,

"or would you rather be a fish?"                           "아니면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In the same song                                                      같은 노래에

is the same question                                               같은 질문이 나온다

but with a mule and a pig,                                     노새와 돼지로 단어만 바꾼


but the one I hear sometimes                               그런데 종종 내 머릿속에

in my head is the fish one.                                     맴도는 소절은 물고기 부분이다

Just that one line.                                                    딱 그 한 소절만


Would you rather be a fish?                                    "차라리 물고기가 될래?"

As if the rest of the song                                          마치 노래의 나머지는

didn't have to be there.                                           노래 속에 없어도 되는 것처럼


아마 짐 자무시가 쓴 '패터슨'이라는 시의 "would you rather be a fish"는 결국 '아하'이지 않을까 싶다. '아하'라는 용어는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이해하고 난 뒤 사용하는 표현인데, 문맥상 영화가 '아하'를 쓴 지점을 되짚어보자면, 그 '아하'는 패터슨에게도, 그리고 관객인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신비하고도 오묘한 어법적 superimposition이니 말이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예술가의 진정성은 아마 자신 주변의 관념이나 사물, 또는 인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철학에 대한 물음이 아닌, 폭포(waterfall) 앞에 앉아 어린 소녀가 썼던 비(water fall)의 대한 시를 떠올리며 스쳐 지나간 과거의 '나'를 '이해'할 때, '내' 삶에서 '내가' 간직했던 '한 소절'을 기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시인에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곧 새해가 되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반복적인 시간 속, 반복적인 상념을 떨쳐내며, 학생이자 직장인, 또는 누군가의 부모로서 중용을 유지하고자 반복적인 사람들과의 계산을 하며 한 해를 보낼지도 모른다. 당신이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 씨처럼, 혹은 패터슨에 살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처럼, 빈 공책을 펴고 당신만이 적을 수 있는 사소한 기적에 대해 적어보길 바란다.


한줄평: 짐 자무시가 거리의 시인들에게 바치는 빈 공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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