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집 말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

'아, 또 그랬네'

by 러브 마망

입춘이 지났지만 바깥 공기는 아직 겨울의 여운있어 창문 밖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아들은 장염으로 집에서 쉬고 있었다.

휴대폰에 문자가 한 줄 도착했다.

“날이 푹하다. 이럴 때 온천 가면 딱 에어컨 틀고 온탕 들어간 느낌 아닐까?”

나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그럼 보일러 온도 내려.”


그 말은 내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날씨가 더우면 보일러를 낮추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밖에서와 다르게 집에서는 느낌보다 조치, 감탄보다 조정. 누군가 말을 꺼내면 나는 습관처럼 “그래서 어떻게 할까”를 먼저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무이, 집안은 온도 내리면 춥습니다.”

그는 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밖에 과일 사러 나갔다가 푹해서 그랬어요.”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그는 온천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냥 묘한 날씨가 재미있어서, 그 감각을 나와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로의 초대를 문제로 번역했고, 해결책으로 답했다.


‘아, 또 그랬네.’

나는 오래도록 해결 중심의 언어로 살아왔다.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삶의 관리자처럼 하루를 운영하며 살았다. 아이들의 일정, 집안의 온도, 통장의 잔고, 노후의 계획까지 모든 것은 조정과 관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말을 꺼내면 그 말의 감정이나 여백보다 먼저 “그래서 어떻게 할까”를 떠올렸다.


그게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사랑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따뜻한 말보다 정확한 조치가 더 중요하다고, 문제를 줄이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이제는 관계의 질을 조금 더 부드럽게 하고 싶어졌다. 가족들과 대화를 오래 하고 싶고, 말이 길어지는 저녁을 꿈꾼다. 그런데 우리 집 대화는 늘 짧다. 밥, 돈, 날씨, 일정 같은 정보가 오가고, 생각이나 느낌은 잘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그런 언어를 먼저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소한 과정의 즐거움을 놓치고 살았다.

집은 잘 돌아갔지만, 말의 온도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우리 집 언어의 온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작은 연구자처럼, 일기장에 실험 노트를 쓰듯이.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때 내 마음은 어땠는지. 그러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대화를 종종 ‘고장’으로 인식하고, ‘수리’하려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요즘은 작은 실험을 한다.

해결보다 공감을 먼저 말하는 연습이다.

“응, 그렇구나.”

“그 느낌 이해돼.”

“재밌는 표현이다.”

이 짧은 문장들이 생각보다 어렵지만, 생각보다 따뜻하다.


아들은 여전히 농담처럼 말한다.

“집안은 온도 내리면 춥습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그럼 온천은 다음에 가자.”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집안 온도는 보일러가 아니라 말이 정한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해결 중심형 엄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가족에게는 옳고 그름보다 친절이 먼저라는 것을. 그리고 친절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한 문장의 순서를 바꾸는 일이라는 것을.


오늘도 나는 연습 중이다.

“나는 지금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라는 신호에

“그래서 어떻게 할까”로 답하지 않기 위한 잠시의 기다림을.

말의 온도를, 아주 조금 올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