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도 온도 차이가 있다

“엄마가 이렇게 나가면,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by 러브 마망

서른이 넘은 아이들.
이미 내 슬하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들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 부모라는 역할은 법적으로 끝나지 않지만, 관계의 중심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기는 분명히 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그리고 어떻게 물러나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 답을 찾는 중이다.


나태주 시인은 “사랑은 허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나는 제일 어려운 주제가 사랑이었어요.
나는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평생 사랑에 대한 시를 썼습니다.
내가 만약 사랑에 대해서 분명히 알았다면 안 썼을 거예요.
그런데 모르니까, 그리우니까, 모자라니까,
그곳에 가보지 못했으니까 계속 가는 거예요.”


시인은 부모 자식 관계도 그러한 것 같다고 했다.
부모 노릇이란 결국 알 수 없는 사랑을 향해 평생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 〈부모 노릇〉은 짧고 단정하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 주고


그리고도
남은 일은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기.


읽을 때마다 쉬운 말인데, 가장 어려운 말처럼 느껴진다.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일보다 기다리고, 참아주고, 져주는 일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설 명절 아침, 나는 괜히 들떠 있었다.
“온천욕을 하러 갈까? 윷놀이를 할까?”
마치 광고 속 가족처럼 왁자지껄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명절이면 자연스럽게 웃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놀이를 하는 것이 가족의 당연한 풍경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상상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덧씌운 허상이었다.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나는 서운해졌고, 서운함은 곧 분노처럼 행동으로 튀어나왔다.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집을 나가려던 나를 딸이 붙잡았다.


“엄마가 이렇게 나가면,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멈춰 섰다.

나는 집을 나가며 사실 도망치고 있었다.
내가 기대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나는 이제 너희들이 중심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


딸은 잠시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엄마, 이제 주도권을 놓고 싶은 거야? 우리는 항상 엄마가 하자는 대로 했잖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늘 가족의 일정과 방향을 정했다. 여행도, 식사도, 집안의 크고 작은 대분분의 일을. 그게 엄마의 역할이라고 믿었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구조였을지도 모른다.


울음이 찬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천천히 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기운이 없어.”


그 말은 사실이면서 변명이었다.
기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도권을 쥐고 싶은 욕망과 놓아야 한다는 자각, 그리고 의지하고 싶은 자존감 사이에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엄마, 우리가 30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서로를 참 모르네.”


그 말은 서운함보다 깨달음에 가까웠다.

“앞으로 집안 대소사에 대해 우리가 세 가지 안을 준비할게. 엄마는 그중에서 결정만 해.”
잠시 말을 고르던 딸은 덧붙였다.
“그리고 엄마, 상처받을까 봐 도망가지 마.”


그 순간 나는 내가 아이들을 너무 오래 ‘관리’만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일정과 계획과 책임으로 대신했다.
따뜻한 말보다 정확한 조치가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랑은 관리가 아니라 관계였고, 관계는 방법이 아니라 감정의 왕복이었다.


우리는 세배를 마치고 온천욕을 하러 집을 나섰다.
네 식구가 함께 탄 차 안에서 나는 내내 ‘부모 노릇’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부모 노릇…
그리고도 남은 일은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기.


나는 아이들을 이끌려고만 했지, 져준 적이 있었을까?

아이들의 선택에, 삶의 방식에, 말의 속도에.


나는 늘 앞서가며 끌어당기거나, 뒤처지면 밀어붙였다.
기다려주는 법은 잘 몰랐다.
지는 법은 더더욱 몰랐다.


그날 다시 알게 알았다.
사랑은 말의 온도에 담긴다는 것을.


차가운 말은 옳을 수 있지만, 따뜻하지는 않다.
따뜻한 말은 때로 비효율적이지만, 사람을 살린다.


온천탕에 몸을 담그며 나는 생각했다.
부모 노릇의 마지막 숙제는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아니라, 말의 온도를 낮추는 대신 높이는 일이 아닐까.


말을 줄이는 것,
결정을 나누는 것,
사랑을 설명하는 대신 믿는 것.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부모였다.
하지만 그날 나는 처음으로 ‘부모’라는 역할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아이들 곁에 앉아 있었다.


차창 밖 풍경이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내가 조금 늦게, 그러나 정확하게 성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모 노릇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방식이 변할 뿐이다.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 주는 부모에서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져주는 사람으로.


나는 지금 그 전환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연습한다.
말의 온도를 재고, 낮추고, 올리고, 조절하는 일.
사랑을 관리하는 대신, 사랑을 믿는 법을.

매거진의 이전글“오늘 우리 집 말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