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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명호 Feb 27. 2024

정체성, 가치 그리고 포퓰리즘

포퓰리즘, 정체성, 가치

브런치의 앞글에서 오늘날 유명세를 타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헤어스타일을 보았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지지자에게는 우상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 모습에 비해 Aki Kaurismäki 감독의 영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에 나오는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은 무해할 뿐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소박한 기쁨을 줍니다. 이같이 헤어스타일 한 가지만으로도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특정한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다소 복잡한 개념입니다. 오늘은 정체성을 중심으로 포퓰리즘을 살펴보겠습니다.         

Aki Kaurismäki 감독의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정체성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체성은 Cambridge 영어 사전에 따르면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사실”이라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우리)를 어떻게 인식하고 분류할지에 대한 나(우리)의 감각을 나타냅니다. 즉, 정체성은 나 자신 그 자체와 다른 사람에 의해 보이는 나를 포함합니다. 사전적인 정의를 넘어 학술적인 연구에서 정체성이란 개인, 가족, 사회관계, 문화적 특성, 정치적 맥락 등에 의해 형성되는 복잡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모습만을 갖고 정체성을 논의한다면 보다 중요한 다른 모습을 빠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란 미묘하고 복잡한 주제라는 점에서 작가들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즐겨 읽던 작가의 한 분인 밀란 쿤데라도 ‘정체성’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는 정체성을 어떤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서술합니다. 쿤데라의 소설 속에서 정체성이란 개인 특성, 가족 관계, 사회경제적 조건, 문화적 환경 속에서 각자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서 벗어나 자신의 노력으로 새로운 모습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본인 스스로 노력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보다는 뭔가 만들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좋겠습니다.      


정체성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포퓰리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 포퓰리즘은 일반 대중의 사회 엘리트에 대한 분노를 먹고 자란다고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반 대중과 엘리트 간 큰 간격이 벌어진 배경에는 엘리트의 진보적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최근 선진국의 엘리트 계층은 개인의 권리 강화와 더불어 소수의 권익 보호를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트의 진보적 가치관은 종교와 가족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가치관과는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성적 소수자 보호, 동성 부부 및 낙태 허용은 하나님과 남녀 중심 가족 관계를 믿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제도입니다. 특히 이들은 진보주의 가치관을 합법화한 엘리트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정치지도자가 나와서 진보적인 엘리트를 응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보수 진영을 대표해서 진보주의 엘리트와 싸울 지도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는 미국 백인 중산층의 상징인 가족과 기독교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진보주의자를 공격합니다. 대통령 시절 그는 연방 대법원 판사에 보수 인사를 임명하여 낙태 관련 기존 판결을 뒤엎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는 가족과 생명은 정부가 아닌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2022년 미 대법원의 판결에 환호합니다. 이같이 포퓰리즘의 등장에는 엘리트에 대한 분노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렇지만 포퓰리즘은 엘리트의 반발만으로 촉발되는 것은 아닙니다. 포퓰리즘은 세대 간 갈등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미국,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세대 간 차이가 뚜렷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젊은 세대는 종교, 전통, 가족보다는 자율성, 다양성을 선호합니다. 반면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소외감을 느끼면서 '자기 땅에서 낯선 사람' (strangers in their own land)이 됩니다. (Norris and Inglehart 2019) 이런 양상은 브렉시트 당시 영국에서도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영국의 젊은 세대는 이미 유럽의 개방적이고 글로벌 지향적인 생활방식에 익숙하지만, 기성세대는 유럽 문화의 이방인으로 남습니다. 즉, 자신의 땅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기성세대는 자신의 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리고 일부 정치인은 분노, 불안감, 불만에 편승한 포퓰리즘을 부추겨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합니다.      


한편, 포퓰리즘은 가치관 차이에서도 발현될 수 있습니다. 진보주의 엘리트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자유무역, 환경보호, 기후변화 등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세계관이 지배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보편적 가치를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보편적인 세계관보다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삶을 보다 중시합니다. 이들 입장에서는 정치지도자가 자신과 같은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섭섭해합니다. 이같이 지역 사회를 지향하는 가치관은 글로벌 사회의 보편적 세계관과는 갈등하면서 포퓰리즘을 등장시킨 또 다른 요인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  또한 포퓰리즘의 등장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종교 중에서도 기독교는 극우 민족주의와 결합해 기독교 가치 보호를 명분으로 포퓰리즘을 확산시킵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와 헝가리의 독재자는 보수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부추기면서 독재 정권을 유지합니다. 이 밖에도 기성세대의 지위 상실 역시 포퓰리즘을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모습은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트럼프 지지의 이유를 경제적 이유가 아닌 자신의 지위 상실에서 찾기도 합니다.

  

이같이 포퓰리즘은 진보적인 엘리트에 대한 반발, 세대 간 갈등, 가치관, 종교, 지위 상실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나타납니다. 엘리트의 진보적 가치관은 사회의 약자 또는 소수자 보호 그리고 개인의 권리 강화를 통해 사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분야에 종사했던 분들에게 자유무역, 환경보호를 근간으로 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매우 낯선 풍경일 것입니다. 보수적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동성 결혼, 낙태 허용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정보통신 기술이 급격히 도입되는 세상에서 교육이 뒷받침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했음을 피부로 느낄 것입니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늘날 포퓰리즘은 확산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 보수적 가족관과 종교관을 지닌 사람, 자유무역 또는 개방화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포퓰리즘을 지지합니다.포퓰리즘은 개인보다는 가족과 종교, 지구촌보다는 지역사회, 교육 또는 기술진보 혜택을 누리지 못하면서 초래된 지위상실 등으로 인해 자신을 피해자로 간주하면서 나타납니다. 제도권의 엘리트에게 자신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었는데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등장하면서 자신의 대변인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슬픈 현실입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원망하고 비난하는 존재로 남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포퓰리스트 지도자 중 미래에 대해 실현가능한 비전을 제시한 인물은 없습니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일부 계층의 한풀이는 해주지만 이는 결코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보다 건전한 미래를 위해 포퓰리즘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 또는 농촌지역에서 전통적인 가족과 종교활동을 하면서 사는 분들은 자유무역, 교육, 기술진보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정체성 관점에서 볼 때 포퓰리즘이란 너무나 단순합니다. 한 사람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첨단을 사는 사람도 자신의 여러 모습 중 몇 가지에서는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시대에 뒤처진 삶을 산다고 해도 그 삶의 일부에서는 현대 사회의 편익을 누리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은 이같이 여러 모습이 중첩되면서 좋기도 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매우 보수적인 종교관 또는 가족관을 지녔을지라도 열린 세상에 대한 호기심만 있다면 여러분은 현대사회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본인이 비록 농촌이나 산업적으로 낙후한 지역에 살더라도 얼마든지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운명이 아닙니다. 정체성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동적으로 등급이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살면서 새 시대의 코드에 다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새 시대의 코드를 모두 부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 중 최소한 몇 개라도 자신의 마음을 내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버트런드 러셀은 할머니로부터 들은 성경 구절을 인생의 모토로 삼습니다. "Do not follow the crowd in doing wrong." (Exodus 23:2)     


다수가 한다고 따라서할 이유는 없습니다.  


참고문헌

Norris, P and R Inglehart (2019), Cultural Backlash: Trump, Brexit, and Authoritarian Popul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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