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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브리즈번 여행 (4)

죄수박물관과 보타닉 가든

by 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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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토리

나는 브리즈번 길리안 집에서 삼박사 일을 잘 보냈다. 단풍놀이 가자며 89세 된 길리안의 언니가 오니 내가 비켜 줘야 하는 상황이었고 나는 시내 호텔을 알아보는데 호주는 기본 방값은 싸도 하루 10만 원이다. 그래서 이번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미토리를 알아보았다. 여성 도미토리를 찾아보니 하루 5만 원 숙박료로 반값인 데다 이제껏 혼자 호텔을 많이 썼으니 경험으로도 해 보자 싶었다. 불편하다 해도 이틀만 자면 귀국행이라 마지막 선택으로 그렇게 예약했다.


역시 시내 가까운 곳, 리뷰 좋은 곳으로 했더니 아주 깨끗했고 체크 인 오후시간까지 짐 맡기는데 문제없어 짐 두고 다시 걸어서 가까운 시내로 가서 며느리 줄 어그 부츠도 사고 초밥도 사 먹었다. 초밥은 점심식사 인기 메뉴인 지 줄을 서서 사 먹는다. 말이 스시지 종류별 김밥이 절반인데 우리식 김밥 반줄 두 개를 먹고 나면 제법 든든하다.


로우머 체크 인
각 층 로비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짐 맡길 때 나는 이 층침대는 화장실 자주 가니 못 쓴다, 했더니 바닥의 1번 침대를 주었고 호텔은 리뷰만큼 깨끗하다. 개인욕실이 아니라는 것과 내 큰 짐가방을 풀기 불편한 거 외엔 다 괜찮다. 나를 제외한 3명은 다 이십 대 여자인데 모두 워킹 할리데이 중이었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여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린은 스코틀랜드에서 대학 졸업하고 와서 몇 달 째인데 이제 카페 일자리를 새로 시작한다고 했다. 엄마랑 전화하면서 스코틀랜드 말을 할 때 독일인인가? 했는데 인사를 하고 말을 하니 영어를 너무 잘해서 내심 놀랐고 나중 스코틀랜드라 했을 때 아하 영국이지 했다. 런던에서 두 달 홈스테이를 했던 아저씨는 결코 I’m British 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I’m Irish 했듯이 스코티쉬도 마찬가지다. 영국인이라 하지 않고 I’m Scotish라고 한다. 오직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웰즈 출신이 아닌 영국인만이 I’m from U.K라 하는 듯하다.

그래서 영국은 축구도 4 팀이 출전한다.


암튼 친절하고 티 내지 않고 겸손하면서 스마트한 게 내가 보기엔 전형적 영국인이다. 그리고 이 층침대로 올라간 베트남 아가씨는 거의 30대인 거 같은데 대단했다. 인천에도 석 달 와서 일했는데 숙식 외에 150만 원 정도밖에 안 줘서 다시 호주행을 도전했고 지금 편의점에 일하면서 꾸준히 돈을 모으고 있다 했다. 돈 다 벌면 뭘 할 거냐니까 자기는 베트남에서 부동산을 하며 돈 많이 벌거라 웃는다. 4명이 다 같은 날 체크 아웃하는데 그녀는 이민가방 같은 것을 들고서 새벽에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층에서 내려오기에 화장실 가려나 했는데 그때 벌써 체크 아웃 한 것이다. 사람이 목적이 뚜렷하면 고생도 고생으로 안 느껴진다는 말이 그녀의 온 얼굴에 자신감과 희망으로 쓰여있었다.

하기사 베트남 임금과 비교하면 최저시급이 시간당 3만 원의 돈을 버니 그녀에게 호주 워홀은 꿈의 실현장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내 옆 침대에 한국 아가씨랑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6개월째로 파프리카 농장에서 일했는데 세컨드 비자받고 잠시 한국에 부모님 뵈러 다니러 간다고 했다. 새벽 4시 차 타기 위해 3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10시간 노동했다니 마음이 짠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한국에서 늦잠자든 습관 고치고 몸무게도 늘었다며 웃는다. 말이 선별작업이지 보통 8~10 킬로 되는 파프리카망을 번쩍 들고 옮겨야 하니 체력소모도 있는 일이었는데 하루 식비 제하면 20만 원 저축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며. 그래도 농장에서 보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성실하고 이태리, 독일 아이들도 많았는데 불평대장에 제일 뺀질이는 프랑스애들이었다는데 나도 웃으며 크게 동의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다닌 회사가 너무 주말도 없이 부려먹고 월급도 차별화하지 않기에 그냥 왔는데 지금 워홀 만족하고 더 계속할 거라니 25세 JW은 심신이 건강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까지 이쁜 K장녀였다.




숙소근처 풍경
커피를 뽑고 하루를 시작하는 호주인들의 아침풍경
아침 브리즈번 마켓 가는 길에 뒷모습이 멋져서 찍어봤다
스시집 줄이 길어 미리 주문할 것을 정해둬야했다

브리즈번 첫날 간 시청박물관 mob을 내가 놓친 것이 있나 더 보려 다시 갔다.

아래는 간략한 브리즈번에 대한 설명이다.


성장하는 도시
1820년대 정착이 시작된 이후, 브리즈번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호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브리즈번의 문화는 전통적 토지 관리인을 필두로 다양한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무려 6만 5천 년 동안 이 지역에 살아왔으며, 현재 중심 상업 지구인 강변 지역에 살았던 씨족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1859년 퀸즐랜드가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분리된 후, 퀸즐랜드는 '이민 식민지'로 알려지게 되었고, 세 차례의 정부가 확장을 위해 인구 증가를 옹호했습니다. 이민 정책은 유럽 전역, 특히 영국 제도에서의 이민을 장려했습니다. 독일 이민자들은 영국계가 아닌 소수 민족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로건, 입스위치, 달링 다운즈와 같은 브리즈번 주변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1901년 연방 정부 수립 당시, 퀸즐랜드는 1만 3천 명이 넘는 호주 최대 규모의 독일인 인구를 보유한 곳이 되었습니다.
1901년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이 도입되면서 유색인종의 이민이 사실상 중단되었고, 퀸즐랜드에 특히 많았던 비유럽계 주민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방 정부가 인구 증가와 국방력 강화를 모색하면서 이러한 제한은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이민자,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에서 온 난민, 그리고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는 아시아와 중동에서 온 일부 이민자들의 유입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1973년 백호주의 정책이 종료되면서 브리즈번은 오늘날과 같은 다문화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민 과정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난민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이 브리즈번에 정착하고 있으며, 최근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인도, 중국, 필리핀계 공동체의 증가가 특히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브리즈번의 활기찬 문화와 정체성을 뒷받침하고 영향을 미치는 다양성을 보여주는 단면에 불과합니다.


시청시계탑이 보이는 건물사이 풍경





귀국 하루 전 4월 30일 브리즈번 마지막 날, 날씨는 맑다. 나야 Everyday is holiday, I’m on holidays.이지만 오늘은 수요일 평일 아침이다. 원래 영국식 영어는 휴가를 Vacation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Hoiday를 쓴다.

이른 아침부터 벌써 숙소 앞에는 큰 가방을 든 아이들이 쏙쏙 도착하고 있다. 계산해보니 내가 있는 숙소가 방 한 개에 침대 4개로만 쳐도 한 층에 10개로 4층에 있으니 최소 하루 160명이 투숙하니 박리다매로 잘 운영하고 있는 거다. 숙소랑 같이 겸업하는 조식 먹는 카페 레스토랑에서 주중에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혹시라도 혼자 있는 여행객들이 적적하지 않게 정보도 공유하게끔 하는 것 같다. 공용부엌도 있어 서로 말 터기 좋게 되어있고 좋은 점이 많다.


아침에 커피를 빼 들고 활기차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겉보기로 운동을 즐기는 호주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고 건강해 보인다. 참고로 호주 아저씨들의 특징은 대부분 나이가 들면 반 대머리인데 얼굴이 갸름하니 다 밀어서 완전 대머리여도 그렇게 보기 싫지 않다. 그리고 배 나온 나이 든 아저씨들도 배바지를 입지 않고 허리띠 벨트를 배 아래로 내려 입으니 ㅋㅋ 굳이 바지 새로 사지 않아도 될 듯하고 다리가 길어서인 지 봐 줄만 하다



시청앞 시계탑이 밤이 되니 축구선수들 광고로 물들었다




170년 브리즈번의 보타닉 가든


브리즈번의 보타닉 가든은 1855년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고, 현재는 브리즈번 도심 속 정원으로 사람들의 휴식처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나무 숲, 청동 조각품, 연못, 분수대 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넓은 잔디밭 위의 넓은 Riverstage는 다양한 공연, 이벤트가 열리는 축제의 장소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도 있어서 가족이 함께 방문하기에도 좋다.

170년 된 이 공원은 꼭 들리라는 말을 듣고 여행 마지막 날 와 본다. 걷다 쉬다 큰 나무에 감동도 하며 이리저리 산책로를 따라가 봤다.


나무가 얼마나 큰지 비교로 찍어봤다
돝자리깔고 아이와 피크닉도 하고 개와 선탠도 하는 여유로운 모습이 평화롭다
고층건물과 공원이 공존하는 도심속의 공원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연상케한다
잘 가꿔진 나무들이 하나같이 건강하고 빌딩처럼 키가 크다
엄청 오래된 나무같은데 가지가 나온 건지 다시 뿌리로 땅에 닿은 것이 신기하다

식수대는 식수를 제공하기 위해 1867년에 최초로 세워졌다.



강 건너편의 캥거루 포인트는 시티 캣을 타고 갈 때 길리안이 설명해 준 곳인데 그곳에서 암벽 타기를 즐기기도 하는 곳이다. 이 절벽은 강물에 의해 천천히 깎여져서 1820년대부터 절벽에서 채석된 돌들이 새로운 브리즈번 타운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나중 죄수 박물관에 갔을 때 자원봉사자 폴은 건물과 벽의 기초가 된 브리즈번 응회암 블록은 인근 캥거루 포인트 절벽에서 채석한 것으로 시공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브리즈번강을 이용하여 밀과 여러 물류를 운송하였고 보타닉 가든의 나무들도 1860년대 이 강의 배로 운송해왔다 한다.



죄수 박물관

10시에 문을 여는데 가니 내가 첫 번째 손님이었다. 친절한 자원봉사 가이드가 어떻게 관람을 하라고 일러준 데로 위층을 보고 아래층을 보는데 호주 최초 정착민이 된 죄수들의 당시 상황을 대변해 주는 소품들에 저절로 몰입이 되었다.


처음에 단층 건물이었다가 1913년에 윌리엄 스트리트로 바로 연결되는 정부 사무실 공간을 추가로 제공하기 위해 기존 지붕을 해체하고 새 층 위에 다시 2층을 세웠다 한다.



제임스 쿡 중위(1768-1771)

호주를 최초로 발견한 쿡의 얼굴이 새겨진 접시와 관련서류들의 설명이다.


제임스 쿡이 지휘한 세 번의 태평양 항해 중 첫 번째 항해는 영국 해군과 왕립학회가 공동으로 엔데버호를 타고 남태평양을 탐험한 원정이었다. 조지 3세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이 첫 번째 항해의 주된 목적은 타히티에서 1769년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천문학사의 분수령이 되었고, 태양계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항해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제임스 쿡은 타히티에서 남서쪽으로 항해하여 미지의 남쪽 땅의 증거를 찾았다. 이는 엔데버호 임무의 두 번째이자 '비밀' 목적이었는데 쿡은 뉴질랜드 해안선을 측량하고 일지 관측을 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쿡은 움직이는 배의 갑판에서 신속하게 지도를 제작할 수 있도록 토지 측량법을 개량했는데, 이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엔데버호는 해안을 따라 14번 상륙했는데, 주로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가장 긴 체류 기간은 보타니 베이에서 8일, 그리고 배 수리 작업을 위해 엔데버 강에서 7주였다. 엔데버호 수리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이미 수집, 식별 또는 기록된 수천 종에 더해 다양한 종, 곤충, 물고기, 도마뱀, 뱀, 악어, 날여우까지 다양한 종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고 캥거루가 처음으로 기록되고 관찰되었다.

선원들은 신성한 번식지에서 거북이를 잡아 식용으로 사용했고, 지역 원주민과 쿡은 만나 의례를 통해 분쟁을 해결했다.


엔데버호는 뉴기니 인근의 알려진 해역에 다시 진입할 때까지 항해를 계속했고, 1770년 8월 22일 토레스 해협의 포제션섬에 영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제임스 쿡 중위는 네덜란드가 오랫동안 뉴홀랜드라고 불렀던 곳에 대륙의 동쪽 해안을 뉴사우스웨일스라고 명명했으니 이것이 호주와 브리즈번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엔데버호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하여 1771년 7월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름이 없이 수천만 년 존재했건만
어딜 가도 맨 처음인 거 마냥
이름을 명명하니
땅과 바다와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기 되었다.


입스위치 북호주 클럽(North Australian Club) 엠블럼이 전사 인쇄된 서빙 접시


북호주 클럽(North Australian Club, 1857)은 퀸즐랜드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신사 클럽'이었다. 당시 입스위치와 브리즈번은 수도 지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는데 클럽은 불법 거주자, 은행가, 법정 변호사, 상인, 에르그 교회뿐만 아니라 엔지니어, 교장, 군인 등 유력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숙소, 식사, 그리고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하면서 초기 핵심 정착민들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의 영화에서 보던 트렁크가 있어 관심 있게 보았다. 트렁크는 보통 매우 크고 무거웠고 주로 배나 기차로 몇 주 동안 여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트렁크는 일반적으로 세로로 세워서 열어야 하며, 한쪽에는 서랍이, 반대쪽에는 옷을 걸 수 있는 옷걸이가 있다. 고급 옷장 제품 중에는 신발 버클/고정 장치, 탈부착 가능한 여행 가방/서류 가방, 프라이버시 커튼, 거울, 화장품 상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죄수들을 때리던 가죽채찍과 발에 차던 족쇄 ㅠㅜ


죄수 채찍

모레턴 베이 형벌 정착촌의 수감자들을 채찍질하는 데 사용되었다. 수감자들은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고, 채찍질 구역으로 끌려가 상반신을 벗기고 손과 발을 채찍질대에 묶였다. 감독관은 채찍질 횟수를 세었는데, 50번에서 250번 사이였고 일부 수감자들은 심한 채찍질 후 입원해야 했고, 일부는 사망하기도 했다.


죄수용 족쇄

족쇄는 정부 대장장이가 제작하여 죄수들에게 장착했다. 상처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쪽 발목에 가죽 커프를 달았고 두 족쇄 사이에는 끈이 달린 쇠사슬을 용접하여 쇠사슬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했다. 죄수들은 족쇄를 착용하고 일하거나 잠을 잤으며, 보통 15명씩 무리 지어 일했다.


족쇄와 채찍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자원봉사자 폴이 쇠로 된 굉장히 무거운 족쇄를 직접 차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열린 투명 리프트 -건축과 무거운 전시물이동을 위해서도 리프트가 필요했다. 건물 완공 연도를 나타내는 1829년

한참을 빠져 보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멜로디를 틀어주고 간다. 그 시절 가구처럼 된 큰 악기통 같은 것에 페니 코인을 넣고 음악을 듣는 건데 150년이 넘은 거니 잘 작동이 되지도 않는다. 암튼 성의가 고마웠는데 그는 화요일마다 여기 와서 자원봉사를 해 주고 있다는 은퇴교사였다.


이름이 폴인 그는 1840년대 아일랜드 감자 기근으로 이민은 5대째 아이리시 후손이다. 나는 더블린에서 한 달 머물렀던 경험이 있기에 그 감자기근에 관한 전시물을 보고 와서 더 짠했다.


폴은 밖으로 나가 오래된 건물과 옆의 벽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벽의 모르타르는 마임스톤(Mimestone)에 사용된 작은 조개껍데기 조각이 보인다.

죄수들은 조개껍데기를 수거하여 분쇄하고 태운 후 모래와 섞어 석회 모르타르를 만들었는데 다른 건축 재료는 캥거루 언덕에서 가져왔다 한다.

포토존이라 찍었는데 코믹한 웨딩사진처럼 나왔다 ㅎㅎ
죄수들이 건설한 건물의 천장
죄수들의 소지품함과 같은 곳에 조리기구도 있었다
옆으로 된 버튼이 있는 바지를 입은 이유를 물어보니 족쇄를 벗길수 없기때문이라 했다 ㅠㅜ
목에도 가죽벨트를 ㅠㅜ

죄수들이 일할 때 쓰던 톱인데 엄청나게 길었다

채찍과 자른 손가락을 담은 병

유명한 '죄수 손가락'

죄수들이 일주일에 6일,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쇠사슬에 묶인 채 허리가 부러질 듯한 중노동을 하던 시절, 어떤 죄수들은 이 잔혹한 형벌을 피하고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ㅇ있는데 그를 증거 하듯 이 작은 병에는 퀸즐랜드 왕립 역사학회의 가장 유명한 전시품 중 하나가 담겨 있다.


그러나 병에 손가락 끝부분이 들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고 다만, 병에 적어도 한 개의 손가락뼈, 손톱, 그리고 손가락 끝부분 뼈가 들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설명이 있었다.




1788년, 밴 디멘스 랜드를 포함한 호주 동부 해안 전체가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 공표되고 1851년 포트 필립 지구는 빅토리아 식민지가 되었고, 1859년 6월 6일 빅토리아 여왕은 퀸즐랜드 식민지를 설립하는 특허장에 서명했다.


그 후 호주 북부와 남부 식민지 사이의 증오와 갈등이 있었지만... 1999년 12월 30일, 평화가 회복되자 퀸즈랜드는 정식 의회와 선출된 입법 노예 의회를 갖춘 자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건설
퀸즐랜드 사회는 이민을 기반으로 건설되었습니다. 1804년, 히어스 존단은 영국 식민지에서 퀸즐랜드 최고의 이민 대리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 이민자들에게 퀸즐랜드를 미국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1864년, 퀸즐랜드는 그들의 여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목록을 개발했고, 그들에게는 통행료가 부과되었습니다. 19세기 동안 퀸즈랜드는 다른 어떤 식민지보다 더 많은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많은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도착했고, 퀸즐랜드는 호주에서 가장 큰 가톨릭 식민지로 알려졌습니다. 1855년, 거의 1,000명의 독일인이 브리즈번 브룸 하누르그에 모였습니다. 그 후 많은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이주민이었고 나중에는 인도인 노예 노동자들이 도착했습니다.
중국인 계약 노동자들은 1548년부터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낮은 임금과 조건에 항의하며 1852년 지역 사회에서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1873년 파머 강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중국인 인구가 증가했습니다.





시청 광장과 조지왕 동상
여기도 투표기간인 지 각 후보들 사진으로
시청앞 캥거루 동상


숙소에서 나와 8시부터 여는 브리즈번 마켓에 왔는데 이제 시작이라 화덕피자가 데워지지 않아 30분을 기다린다. 이 시장에도 교복에 모자 쓴 아이들이 주스를 들고 지나가는데 단정한 모습에서 학생들이 규범과 규율을 지키면서 단체 생활을 익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라 인간이 완전히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러니 함께 사는 공동체의 규율은 중요한데 언제부턴가 입시에 올인한 우리 교육은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하는 공부만 중시 여기고 좋은 대학, 직장 위한 학교교육이 되었다 ㅠ ㅜ

자녀의 미래에 대한 학부모의 불안과 이 땅의 교육 제도가 아이들을 불행하게 하면서 지속되고 있으니 나 자신 교육현장에 몸 담고 있었지만 여전히 부끄럽고 민망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한 줄 서기 교육에서 벗어나서 각자 아이들의 타고난 자질과 소양을 개발하여 장차 자신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 인생을 향유하고 가도록 하는 그런 통합적인 교육의 정말 절실이 필요하다 본다,





로마 스트리드 파크랜드


로마 스트리트 파크랜드 부지는 길고 다채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이곳은 중심부에 위치하고 천연 저수지를 갖추고 있어 여러 원주민 부족의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1800년대 브리즈번 정착촌이 확장되면서 이 지역의 용도는 다양해졌고 1874년에는 브리즈번 종착역으로 알려졌던 로마 스트리트 기차역이 건설되고, 1884년부터 1964년까지 이 지역의 일부는 사람들이 신선한 농산물과 살아있는 동물을 살 수 있는 브리즈번 마켓으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2001년 초 로마 스트리트 파크랜드가 탄생하면서 이 지역 역사의 또 다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난 아이 동상이다.

교회와 국가 내에서 학대를 당하고 살아남지 못한 모든 아이들을 기리며 이 추모비는 2004년 12월 1일에 설립되었다.


대나무길 양옆의 폭포소리가 엄청 시원하다


숙소가 로마나이니 거기서 가까운 공원이었다. 암튼 이곳은 공원이 많아서 좋다. 도심 어디에 살든 근처에 공원이 있어 사람들은 돗자리만 갖고 가면 피크닉과 선탠을 즐길 수 있으니 부럽다.

그렇게 시원한 폭포 물소리를 들고 그늘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도마뱀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놀랐던지 도망가서 걷다가 작은 새끼 도마뱀 두 마리를 다시 만났다. 숲이 깊은 데다 그늘진 곳 산책로였으니 그들의 서식처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가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긴 것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얼른 산책로를 벗어났고 다시 호수가 잔디 주변으로 나왔다.


잔디밭에서 편안하게 피크닉을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여유를 보면서 저들은 도마뱀을 나처럼 그렇게 징그럽게 생각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도 다만 나의 마음일 뿐 일지인데 놀란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는 내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물소리가 여전히 상쾌하고 저녁나절이 되어서 시원하니 지난 발리 25일과 호주 15일 40일간의 여행에 대해서 혼자 스스로 평가하며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우리의 기억은 휘발성이다. 때론 방금 전 내가 체크인한 호텔 이름도 가물거리고 내가 어제 먹은 음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매번 여행일지 쓰듯 기록을 하게 된다.

이렇게 구글 지도를 켜고 찾아온 이곳 이름도 첨엔 헷갈렸다.

공원 이름은 로마 스트리트 파크 랜드다. 이곳은 옛날 원주민들의 집결 장소이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니 작은 동물들도 그들의 서식처로서 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 스트리트에서 가까워서 이곳에 왔고 숙소 로마나는 맨 처음 내가 처음으로 도미토리를 경험 차 신청해 보니 시내 중심가랑 가까워 좋고 걸어서 시청과 모든 곳에 갈 수 있다. 떠나기 전에 쇼핑할 것도 있으니 잘 선택한 것 같고 여행 마무리를 이렇게 잘하게 되니 마음이 흡족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정말 귀중한 교훈도 얻었다. 나의 실수라기보다 미성숙함으로 금전적인 손실이 조금 있었지만 그러나 그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의 가치는 돈과 비교할 수 없다. 정말 친절한 사람을 만났고 그들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나도 또한 그런 미덕을 더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리와 호주를 돌아보면서 쉼도 호기심 충족도 있었고 호스트 경험도 더 쌓고 가니 두루 만족스럽다. 남은 이틀 일정도 잘 마무리하고 돌아가야겠다.




시내에는 길가 초밥집부터 버그가게, 그리고 여러 종류 음식이 모여있는 푸드코너가 잘 되어있다. Time to refresh, Fuel up fast란 큰 글씨와 함께 먹으면서 랩탑도 하고 충전도 할 수 있는 편한 공간이다.


각종 자기가 원하는 재료를 넣어 무게로 계산하면 5분내 끓여주는 곳이라 이틀 연이어 갔다.
직접 재료를 골라담아서 계산후 바로 먹으니 좋았다




드디어 귀국날~!


여유 있게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 샌드위치와 롱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쉰다. 나의 분신 같은 배낭과 크로스백, 그리고 큰 짐가방을 보니 애틋하기도 하고.... 이제 컴백 홈 한다 생각하니 좀 아쉽기도 하면서 모든 계획이 clear out 되어 홀가분하기도 하다.

* 호주는 왜 컵 홀더를 사용하지 않고 저렇게 컵을 두 개 세 개 겹쳐서 사용하는지?..ㅠㅜ
아무리 나무나 자원이 풍부한 나라라 해도 저것은 자연보호차원에서 아니다 싶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중간 사이즈는 컵두 개, 큰 사이즈는 컵 세 개를 겹쳐주는 것 같아
좀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공항은 언제나
떠남이 주는
설렘과 긴장이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여행의 성취와 만족감과 함께
떠나온 곳,
내가 속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안식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항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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