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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발자크 생가

에펠탑과 후배네 집

by 김별


파리 둘째 날, 나는 대학 후배와 약속이 있었다. 내가 프랑스에 있을 때 후배도 와서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있고 이후로도 파리에 올 때마다 신세도 지고 밥도 같이 먹었다.


후배가 에펠탑 근처에 살기에 일단 하루 일정동선을 에펠탑 주위로 잡고 AI에게 근처에 갈 만한 곳을 물으니 La Maison de Balzac 발자크 생가를 추천해 주었다.


그래도 한때 불문학도였는데 파리를 몇 차례 오면서도 아직 그곳을 안 가봤던가... 싶었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는 프랑스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자, 사실주의의 창시자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은 약 90여 편에 달하는 소설과 중편을 묶은 대작으로, 프랑스 사회 귀족, 부르주아, 예술가, 법조인, 상인, 빈민 등 전 계층에 대한 인물묘사를 그렸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위대한 사회 정치가적 시선으로 병폐의 심연까지 뛰어든 유일한 사람, 1789년 이후 프랑스의 무질서를 위에서 내려다본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그는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의 허구적 낭만주의를 넘어서, 현실 사회의 인간 군상과 욕망, 계급적 갈등, 돈과 권력의 작동 방식을 파헤쳤다.

“현실은 그대로 묘사할 가치가 있다”며 그는 사실주의 거장답게 과감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

"동물학적 종이 있듯이 사람도 사회적 종이 존재한다"라고 생각한 그는 각 등장인물은 사회의 한 단면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런 그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작품에 반복 등장해,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소설을 만나는” 독창적인 네트워크 구조를 이루며 소설이 실존하는 사람들의 연대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돈이라 보는 그였기에 등장인물들의 재정 상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했다.

발자크의 이런 면은 19세기 아직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여운이 살아있던 그 시절에 얼마나 그가 시대를 앞서가며 예리하게 통찰하였는지 보여준다.


지금이야 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신자유주의 등등으로 당연시 여기는 개념들이지만, 그 시절에 그가 먼저 그런 조류를 간파하고 그의 작품 속에 녹여냈다는 것은 놀랍다.

결국 이 인간희곡 속에는 91개의 주요 등장인물과, 약 600개의 반복 등장인물을 포함하여 2,500개의 등장인물이 등장했다.


그가 인간희곡을 창작했던 서재와 한 벽면을 다 차지하는 등장인물들의 계보가 어마했다. 수정보완한 내용들로 빼곡한 원고에서 작가의 노고가 느껴진다.

'어제 19시간 일했는데, 오늘은 20시간이나 22시간 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루에 16페이지에서 20페이지 분량이 요구되고, 저는 그것들을 쓰고 교정합니다.'

~1846년 10월 30일 금요일 그의 일기다.



3층 건물로 된 생가의 정원과 화장실도 가 보았다.


나는 언뜻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한 인간의 열정과 도전을 이루는 노력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대한 취재와 관찰, 그리고 치밀한 세부 묘사로 그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렸고 열정적이고 집요한 집필 태도로 매일 밤 원고를 써 내려가며 강력한 커피 중독자가 되어갔다.


생가인 이곳은 발자크가 1840년대 인쇄 출판사업 실패로 진 빚쟁이를 피해서 숨어 살던 집으로서 그의 원고, 편지, 초판본, 초상화, 발자크 관련 예술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정원도 있어 방문객들이 잠시 그를 생각하며 쉴 수도 있어 좋았다.

정원에서 에펠탑을 바라볼 수 있고 생가 박물관 입장료는 감사하게도 무료다. 개인적으로는 돈을 내고도 가볼 만한 곳이라 생각한다.

벽 사면에 작가에 대한 내용들로 가득 찬 방...

한 사람의 생에 대해서 이렇게 할 말이 많았을까? 그와 작품에 대한 글로 빼곡한 방에 들었었을 때 자신이 못생겼다고 한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찾아보니 문학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외모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다.

그는 흉상이나 초상화에도 보이듯이 키가 작고 통통하고 둥근 체형이었고 둥근 얼굴, 큰 코, 두툼한 입술, 다소 지저분한 차림새 때문에 “촌스러운 시골 아저씨 같다”는 평도 있었다.

평생 빚에 시달렸고 원고에 몰두하다 보니 옷차림에 신경을 안 썼고, 당대 지인 중에는 “인물이 못나도 매력적인 기운이 넘쳤다”는 식으로 한 사람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못생겼다”는 평가가 많았다.


발자크는 자기 외모가 조롱당하는 것을 알았고, “내 작품이 내 얼굴을 대신한다" 말하며 유머러스하게 받아넘겼다 한다.

그는 친구들에게 “여인들은 내 이마와 코를 보지 않고, 내 펜 끝을 본다” “나는 못생겼지만, 내 작품 속 인물들은 아름답게 태어난다”는 말을 남겼다.


비범한 생각으로 가득 찬 강력한 머리, 돈에 대한 탐욕, 빚에 허덕이며 자만심에 가득 찬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떠들게 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기이하게 보이고 싶어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기인에 천재에다 플러스 분명 대인이었다.


결국 외모보다는 그의 압도적인 에너지와 대화의 매력으로 그는 많은 여성과도 교류했고, 최종적으로 폴란드 귀부인 한스카 백작부인과 결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삶과 사랑은
사실적인 그의 작품과는
상반되게
아주 낭만적이었다고
본다.


소설 속에서 보여준 인간 심리에 대한 통찰과 열정적인 문체 때문에 발자크는 수많은 여성 팬들의 편지를 받았다. 덕분에 그는 더욱 여성 심리와 정서를 통찰할 수 있었고 결국 그의 여성교류와 작품성이 윈윈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더욱 풍부하고 생생하고 빛나게 되었을 것이다.


귀부인 한스카와 발자크,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15년 가까이 장거리 연애를 이어갔고, 유럽 곳곳에서 몰래 만났다. 그러다 한스카의 남편이 사망한 후, 오랜 기다림 끝에 1850년에 파리에서 정식으로 결혼한다.

발자크는 그녀를 “나의 이상, 나의 영감”이라 불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불과 결혼 5개월 뒤인 1850년 8월 18일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51세로 오랫동안 밤샘 집필과 과도한 커피(하루 50잔 이상의 기록도 있다)와 스트레스, 빚, 과로가 사망원인이었다.

임종 무렵 그의 곁에는 친구이자 대문호였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있었다.


장례식에서 빅토르 위고는

“오늘 한 작가가 죽었지만, 내일 그의 작품은 살아남아 인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라고 추도사를 했다.


정말 냉철하고 열정적이었던 작가이자 시대적 풍운아로 살다간 발자크는 요즘 말로는 뇌섹남이었던 것 같다.

여성들의 애정과 관심은 발자크가 빚과 고된 집필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어주었고 한스카 부인과 오고 간 두 사람의 서신은 수천 통에 달하며, 지금도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 사람의 생애와 업적이 되는 일,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발자크의 생가 방문이었다.




간간이 뿌리는 비를 맞으며 다시 센 강변으로 나왔다. 조금만 걸으면 닿는 곳에 파리 사방에서도 볼 수 있는 에펠탑이 있다. 수학여행 온 아이들부터 여행객들과 사람들로 북적인다.




파리는 가을가을하다. 흐린 날씨가 으슬하지만 운치도 있다.


나도 10년 전 가족사진을 추억하며 다시 에펠탑 주변에서 사진 몇 장을 남겼다.

얇은 옷을 몇 개 껴입었지만 여전히 추워서 남편과 나는 날씨 탓인지 사람들로 더욱 빼곡한 카페에 들어가서 잠시 쉬다 후배 집으로 갔다.




벌써 40년이 넘은 프랑스와 파리에서의 시간을 후배는 여전히 작은 체구로 꿋꿋하고 당당하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불시를 전공했고 파리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치다 몇년 전 그녀는 과로로 쓰러지는 아픈 일도 있었다.


지금은 학교 강의 시간을 줄이고 건강을 돌보며 쉬엄 번역일도 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기쁜 소식이 있었는데 그간 틈틈이 써둔 "어미사전" 원고가 프랑스 유명 출판사로부터 출판제의를 받아서 이제 마지막 원고 수정을 하고 있었다.


후배가 해준 프랑스식 오리요리와 시금치 파이,

그리고 그녀가 공저로 번역한 시조집을 선물로 받았다.

그녀가 번역한 시조집을 보며 나도 새삼 우리 민족의 특성과 역사, 풍류를 느낀다.


한국어에서 “어미”는 동사·형용사 어간 뒤에 붙어있으면서 문장의 의미와 문법적 기능을 바꾸는 요소다.

예를 들면 동사 먹다와 관련된 "먹을까? 먹어라, 먹자, 먹습니다, 먹고 나니 먹자마자" 등등 어미는 무궁무진하다. 처음에 후배도 한 600개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1400개가 넘는 어미정리를 하게 되었다는데 나는 후배의 꾸준함과 노력에 놀랐다.


한국어 문법은 어미 활용에 따라 뉘앙스가 크게 바뀌기 때문에, 외국인 학습자에게는 체계적으로 정리된 이런 자료가 필요하고 유용하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어 교재에서도 “어미 활용표”나 “어미 사전”을 별도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하니

후배의 “어미 정리” 책이 출간되어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할 한류와 한글 학습에 큰 도움이 되길 기원하며... 나는 그녀가 한 일이 내 일처럼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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