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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 라로셸

2만명 이상이 굶어죽은 신교도의 수도

by 김별


라로셸은 프랑스 서부 뉴 아키텐 지역에 있는 항구 도시다. 이 도시의 기원은 프랑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갈로-로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에는 어촌이자 작은 도시였으나, 12세기에 아키텐 공작 가문의 보호 아래 자유무역항 특권을 얻어 성장하기 시작했다. 보르도처럼 바다와 강을 끼고 부를 축적하며 프랑스의 주요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도시 인구는 시내가 약 8만 명이고, 외곽 지역을 합치면 약 17만이 넘는다. 항구에 접한 시내 면적에 비하면 인구 밀도가 꽤 높은 편이라 우리를 호스트 해 준 이자벨 부부는 시내의 높은 땅값 때문에 교외로 나가 전원주택을 구매하여 훌륭하게 개조해서 살고 있었다.

이자벨 부부와의 따뜻한 동행

이자벨은 54년생으로, 남편과 함께 교사로 은퇴했다. 그녀는 대학에서도 영어를 가르쳤다. 서바스(Servas)라는 여행단체와 외국 유학생들이나 여타 해외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도 하고 있었다. 취미로는 남편 클로드와 함께 자전거 타기, 요리, 정원 가꾸기 등을 하고 여행을 좋아해서 이미 한국도 왔다 갔고, 세계 각 대륙으로 여행을 다녔다.


수영장도 있는 이자벨의 넓은 집

우리는 호스트 체험 중 가장 큰 방과 욕실, 거실을 제공 받았다. 첫날 역으로 마중 나온 그들 부부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시내를 산책했다. 보통 밖에서 식사할 때는 숙식 제공과 현지 여행안내까지 해 주는 호스트 가정에 대한 고마움으로, 게스트인 우리가 식비를 부담하는 것이 에티켓이다. 그리고 의무는 아니지만, 문화 교류 차원에서 한국 요리를 대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자벨의 집에서는 프랑스식으로만 먹고 한국 요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호스트 마지막 날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전통 음식인 슈크루트를 해 주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클로드는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시큼 새콤한 양배추가 한국사람의 김치와 같으니 좋아할거라며 맛난 소시지, 훈제 돼지고기와 곁들여 해주었다.

마중 나온 이자벨은 마침 장을 보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래서 어딜 가나 내가 좋아하는 장 구경도 했다. 가면서 그들이 결혼하고 사진을 찍은 시청의 발코니도 보여주고, 아기자기한 식당과 상점들을 보고 나서 구항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클로드는 보르도가 와인으로 유명하다면, 이곳은 원래 소금 교역이 유명했고 나중에는 와인과 증류한 코냑을 영국과 네덜란드에 많이 팔았다고 했다.

장 바구니 들고 산책



맛난 점심과 식당 주변 시청 앞 분홍색 파라솔은 유방암 퇴치 및 예방 운동으로


구 항구앞 풍경


자유무역항 라로셸의 흥망성쇠

라로셸은 16세기부터 개신교도 위그노의 중심지였기에 프랑스 왕실 및 가톨릭 세력과 충돌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개신교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리슐리외의 라로셸 포위가 있다. 해안선을 따라 있는 옛 항구의 세 탑은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는데 이 탑들이 위그노를 탄압한 포위에 맞서 해상 봉쇄용 방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자유 무역을 통해 독립적인 상업 도시로서 부를 쌓아가던 라로셸은 프랑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위그노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루이 13세의 절대 왕정 강화를 위해 "왕권보다 강한 어떤 자치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라며 12만 명의 왕실 군을 동원해 무려 14개월 동안 도시를 포위했다. 그로 인해 당시 시민 2만 7천 명 중 2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하니 그 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약 1.5km 길이의 거대한 석제 제방으로, 바다에서 식량이나 구호 물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결국, 1628년, 라로셸은 항복했고 리슐리외는 도시 자치권을 폐지하고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다.

구시가지(Old town)에는 아직도 위그노 관련 거리 이름들이 남아 있고 좁은 골목, 상점, 시장 등 볼거리가 많고 분위기가 있었다. 여행 전 미리 알았더라면 가 보았을 ‘프로테스탄트 박물관’을 못 보고 와서 좀 아쉽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의 자유는 목숨처럼 소중했을 것이고 그래서 *낭트 칙령 이후 라로셸은 신교도들의 도피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가톨릭 신자 왕이 왕권을 강화해야 할 상황에서 깨지게 되었고 핍박의 칼날은 결국, 위그노의 수도였던 라로셸을 향했던 것이다.


세 탑이 보이는 구항구


남편과 나는 이튿날에도 시내로 나와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는 무료 유람 버스도 타보았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바닷가를 걸었다. 아픈 역사를 지닌 구항구에 지금은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었고 파란 물결을 헤치며 요트들이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 시원했다. 항구 쪽 뷰를 즐길 수 있는 곳의 식당에서 사람들은 햇빛을 즐기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자벨과 다시 만날 약속을 한 Place Verdun 쪽으로 가는 중 길 양 편으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쇼핑을 할 수 있는 아케이드가 줄지어 있었다. 한때 무역항 으로서의 부를 실감케하는 상점들을 구경했다. 생루이 드 라로셸 성당이 있는 베르덩 광장 앞에는 마침 자폐아들을 위한 행사가 있었다. 따뜻한 커피와 빵을 간식으로 얻어먹고 좋은 일을 하는 봉사자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짧은 인터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올 즈음 우리를 데리러 온 이자벨은 근처 바닷가 마을로 데려가 드라이브를 시켜주었다. 썰물로 넓어진 해변과 철새들이 머무는 곳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백년전쟁 시절의 오래된 교회를 보여주었는데, 높은 곳에 있는 교회는 피난처이자 요새 역할을 했다 한다.

철새 도래지와 오래된 교회



이자벨의 가족 이야기

다시 이자벨의 집으로 돌아와 넓은 정원에 있는 지붕 달린 수영장도 보았다. 정원에서 보석처럼 알이 터진 석류를 따서 그 석류로 이자벨이 착즙 주스를 해 주어 마셨다. 마당의 큰 호두나무에서 호두도 주우며 함께 가을을 만끽했다. 보통 파리에 살면서 전원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자벨은 이곳이 주 거주지이고 파리에 물려받은 집이 세컨드 하우스라 자주 파리에 간다고 했다. 그녀의 파리 집은 어머니 쪽으로 4 대가 살던 집이었다.

이자벨은 환갑 때 자신의 유년과 청년기를 보낸 그 파리 집에 대한 역사를 책으로 출간하여 친지들과 함께 기념했다고 했다. 흥미를 느낀 나는 그 책을 한 권 갖고 싶다 하니 서재를 뒤져 겨우 남은 한 권을 찾아 주며 다음에 올 때 그녀의 파리 집을 방문하기 전에 읽고 오라고 했다. 네 세대의 가족 이야기인 데다 삼촌과 사촌들까지 지금도 대 가족이 자주 모이고 사는 공간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내 게는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 천천히 읽어보니, 그 집에 대한 역사가 곧 파리 역사의 한 단면처럼 여겨졌다. 그녀의 고조 할아버지가 파리의 신흥 부르주아로서 큰 건물을 매입하고, 그 후 증 조부모, 조부모 대에 걸쳐 증축하였던 역사적인 과정이 책에 담겨 있었다.


직접 만든 슈크루트는 정말 맛있었다. 디저트와 치즈 그리고 아뻬리티프 식전주


요트가 있는 바다와 비치

그녀가 싸인해 준 '파리 39번지' 책과 허브주머니


이자벨에게는 세 명의 남자 형제가 있었다. 그중 남동생은 파스퇴르 재단의 대표 의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지만, 지금은 과로로 건강이 좋지 않아 안타깝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막냇동생은 따로 큰 집을 사서 재 건축하였다며 가족 앨범 사진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자벨의 어머니는 90세가 넘어서도 건강하게 활동하셨는데, 부계와 모계 모두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집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2박 3일 동안 내가 받았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하며 떠나오면서, 문득 한 시 구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자벨의 게스트 방명록에 이렇게 남겼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 시 중에서)

"이자벨, 네가 쓴 책은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고 이 시를 떠올리게 해. 고마워 이자벨. 역까지 데리러 와주고 맛있는 식사와, 바닷가 산책, 정원에서 딴 허브 향 주머니까지 모두 고마워. 우리가 만난 인연 소중하고 나도 또한 너처럼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누며 살다 갈게~ from Kim"

사람은 단순히 한 점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니 한 사람의 인생은 과거의 경험, 현재의 생각,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품고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곧 한 '인생의 역사'를 맞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낭트칙령 ~ 앙리 4세가 1598년 4월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칙령

** 백년전쟁 ~ 1337~1453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인 장기전, 왕위 계승과 영토 분쟁이 발단이었고 프랑스의 승리로 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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