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교직 생활 (17)

가르치며 배웠고, 부모가 되어 다시 배운 학교생활

by 김별


90년대의 교직 생활에는 지금은 사라진 풍경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일직’이었다.

일직이 있는 날이면 남편 차에 두 아들의 세발자전거를 싣고, 온 가족이 학교로 출근하듯 함께 갔다.

두 살 반 터울의 형제는 따로 친구가 필요 없었고 강아지들처럼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수업 시간은 늘 즐거웠지만, 담임 업무는 언제나 어려운 자리였다.


중3 여학생 담임을 맡았을 때 한 아이가 가출을 했다. 가정방문도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소식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나서야 아이는 학교로 돌아왔다. 대구의 다방 근처에서 발견되었던 소문은 좋지 않았고, 아이의 가정환경 역시 거칠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린 뒤, 아이를 바로 교실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동안 도서실로 등교하게 하여 책을 읽게 하고, 개인 상담을 이어갔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교실로 들여보냈다.


사춘기의 또래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영향이 번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 아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나의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 나는 대구에서 남편의 학교가 있는 마산으로 시도 간 교류로 근무지를 이동했다. 집도 시댁이 있던 창녕에서 마산으로 옮겼다. 출퇴근은 한결 편해졌지만, 담임의 무게는 여전했다. 특히 중3 진로 상담은 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남자아이는 미용고를 가고 싶어 했고, 부모는 인문계를 고집했다.

“그런 데는 날라리나 가는 곳 아니냐”는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나는 아이의 감각과 재능을 이야기했고, 시대가 바뀌었음을 설명했지만, 부모는 “인문계 가서 꼴찌를 해도 괜찮으니 원서를 써 달라”라고 했다.


또 다른 여학생의 경우는 더 씁쓸했다. 미용고를 보내면 ‘계모가 아이 인생을 망쳤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싫다는 이유였다. 그때 나는 마음에 분통이 터졌다.

자식이 언제부터 부모의 체면을 장식하는 액세서리가 되었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한국 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학부모 의식 교육’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수업 첫날이면 나는 아이들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수업 시간만 집중하면, 영어는 학원 안 다녀도 된다.”

아이들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선생님, 제발 그 말 엄마한테 해 주세요.”


아이들은 하루 종일 교실 의자에 묶여 있다가, 방과 후에는 또 다른 의자로 옮겨 앉았다. 잠이 모자라 수업 시간에 엎드리는 아이도 있었고, 성장기임에도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까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아이들의 태도를 마냥 탓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의 불안에 떠밀리고 사회적 강박을 떠안은 채 버텨야했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권 교사인 나는 이 구조를 비판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아이들을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정해진 교육과정과 평가 체계 안에서 다그치며 시험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 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이 시스템이 굴러가도록 돕는 톱니 중 하나였다.


그래서 엎드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단지 ‘졸린 학생’을 본 것이 아니라, 불안한 부모와 경직된 제도,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놓인 아이들의 얼굴을 함께 보았다. 그 연민은 나를 더 좋은 교사가 되게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교육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끝없이 묻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미명하에 부모들은 너무도 당연한듯 아이들을 입시라는 좁고 긴 경쟁의 터널로 몰아넣고 있었다.


영어만 해도 그렇다. 교과서와 EBS, 좋은 자료는 넘쳐난다.

문제는 아이가 소화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밀어 넣는 공부였다.

나는 수업 시간에 가르치지 않은 내용은 시험에 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고, 아이들과의 약속도 지켰다.

그 결과 아이들은 성적에 대한 공포 없이도 충분히 잘 해냈다.


그러나 제도는 늘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었다.

유치원부터 수능까지, 끝없는 경쟁과 줄 세우기.

대학에 가면 취업, 취업을 위해 또다시 영어.

나는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하곤 했다.

“이 시스템이 네 인생을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속도와 재능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나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부속품 같은 교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내 아이도 중학생이 되었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아이의 모습은 낯설고 애잔했다. 두발 단속에 몇 번이나 걸리고,

나는 내가 가는 미장원에서 아이의 마른 얼굴형을 고려해서 앞머리를 조금 남겼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같은 공립학교지만 그쪽 학생주임이 아주 세게 머리 단속을 하나보다 하며 나도 아이도 마음이 긁혔다.


“엄마, 나 학교 안 가면 안 돼?”

어느 날 아침,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엄마, 나는 행복하지 않아.”

나는 한번도 아이에게 공부하라 강요한 적도 보습학원에 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학교가서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즐겁게만 지내라고 했다.

그런 내가 아이에게 엄마가 네게 안 해 준게 뭐 있냐는 말에


“엄마는 한 번이라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본 적 있어?”

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나는 망치로 한방 세게 맞은 거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고 깨달았다.

나는 늘 아이를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만 아이를 이끌어왔다는 것을.

교복과 규율, 획일화된 틀 안에서 아이는 숨이 막혔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아이는 학교에 가방을 들고나갔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를 배회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교복을 입은 아이에게 “왜 학교 안 가느냐”라고 묻던 동네 할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혼자 평상 같은 데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교사로서가 아니라 한 엄마로서 또 무너졌다.

물론 아들은 보통의 평균적 아이들 보다 감수성이 더 예민하고 섬세한 편이긴 하다.

지금도 마음결이 그러하다.




중3이 되던 해, 나는 대안학교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교육이란 거대한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아이라도 거기서 빼 내오자는 심경이었다.

그리고 입시 경쟁과 줄 세우기를 넘어 아이의 숨 쉴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철학을 가진 학교를 만났다.

그 선택은 우리 가족 모두를 안도하게 했다. 아이는 좋은 담임을 만나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그 학교는 미인가 대안학교였기에 학부모들이 함께 학교를 지원하며 지탱했다.

교가를 함께 부르던 날, 나는 울었다.


배운다는 것은 결국 꿈을 꾸는 일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교사가 아니라 학부모가 되어 다시 배웠다.


돌이켜보면, 아들은 대안학교 학부모가 될 기회를 통해 더 나은 교사가 되도록 나를 이끌어준 소중하고 귀한 스승이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Dance like no one is watching.
Love like you've never been hurt.
Sing like no one is listening.
Live. As if today is the last day

이 싯구는 여전히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유효하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 처럼 !


사춘기를 혹독하게 치른 아들 도무지 행복하지 않다던 아들 앞에 무너졌던 엄마의 마음...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며 아들을 지켜주고 싶었어도 방법이 없었던 안타까움은 마치 절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그런 아들도 이제 자라 삼십대의 성인이 되고 나니 생각나는 시가 있다. 아들의 선생님께 아들이 선물로 받았던 시집의 시였다.


나도 제도권의 교사였지만 나보다 어린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말투하나 표정하나에서 아들을 맡긴 엄마의 마음으로 또 존경심으로 내게 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아들이 말하길

엄마 말투는 ~~해라인데

00샘은 항상 00아 우리 이거 한번 해 보면 어떨까?로 다르다고

이후 나는 '해라체'의 내 말투를 아들과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앞에서도 바꿔갔다.






* 00학교 교가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린 알고 있네 우린 알고 있네(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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