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체험

by 고수머리

요즘 '푸른 사자 와니니'라는 책에 푹 빠져 재미있게 읽고 있는 아들을 보며 '나는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지?'란 의문이 들었다.
나의 어릴 적 집에는 어린이가 읽을법한 책들이 많이 없었는데 지금 왜 나는 도서관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음….
만화책 덕분인가?!!
책에 관심 자체가 없던 어린 시절 처음 만화방이란 장소를 알게 해 준 건 엄마였다.
그때 내가 살던 곳은 산동네 꼭대기였는데 집에 가려면 산동네 입구 시장통을 지나 산의 정상을 향에 올라가야 집이 나왔다.
나 혼자 시장통을 다닐 때는 눈에 띄지도 않고 그냥 우중충하고 허름한 가게였는데 그곳이 알고 보니 만화방이었다.
엄마가 왜 만화방을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에게 그날은 유독 무료한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 힘겹게 집에 올라왔다. (산동네라 항상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빌려온 만화책을 보는 순간 나는 만화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만화방의 첫인상이 너무 안 좋아서 다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만화책의 힘은 대단했다.

무서웠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어지고 그곳은 나의 최애 장소가 되었다.
어른들과 담배 연기로 가득한 곳에 중학생이었던 나는 스스럼없이 드나들었고, 책에 붙은 먼지 가득한 냄새도 너무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종이를 넘기는 그 맛은 끝내줬다. (낡디 낡은 검은 소파의 푹신함도 한몫했다) 만화책은 나에게 엄청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학교 하교 후 운동하러 갔다가 집으로 가기 전, 꼭 그 만화방에 가 순정 만화를 시작으로 만화방에서도 다들 찾지 않는 구석 아주 구석의 만화까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순정물 포함 무협물, 학원물, 스포츠물 등등 온갖 장르의 만화를 폭식하듯 읽어갔다.
나중에는 동네 다른 만화방까지 발을 넓히며 내가 가진 시간과 돈을 만화방에 쏟아부었다.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만화책을 보는 시간만큼은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꾸게 해 주더라.
소심한 성격이라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쭈뼛거리며 현모양처라고 들릴 듯 말 듯 답답한 대답만 하던 나에게 여러 가지 직업과 다른 삶도 있다고 만화책은 가르쳐 주었다. 즉 나에게 만화책과 책은 간접 체험의 공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글만 있는 책도 읽기 시작했다. 물론 무거운 주제의 책은 아니다. 남녀의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한 할리퀸 연애 소설이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읽는 책의 장르 폭도 넓어지고 책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책이 있는 장소면 어디든 포근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도서관, 만화방(요즘 볼 수 없어 너무 슬프다.), 서점, 북카페 등등 책에 둘러싸인 곳이라면 외국의 도서관도 좋다.
평소 집안일을 끝내고 도서관에 가 책도 보고 차도 마시며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관 수업 중 동화책을 만드는 수업을 알게 돼 동화책 출판을 경험하고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글 쓰기는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만화책과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뭐 크게 다른 인생이었겠냐마는 그래도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화책을 만나서 책을 만나서….
위로받고 표현할 수 있어서, 나에 대해 더 알게 되어서 기쁘다.
모두 책 덕분이다.

살면서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면 항상 망설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정하기 어려울 땐, 직접 경험으론 부족했던 부분을 책으로 체득한 간접 체험으로 메꿔 선택했다.
그 선택이 나를 더 험난하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큰 힘이 되어주었고 새로운 경험으로 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책들은 여러 방식으로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 함께할 것이다.

책 너~~ 영원히 같이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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