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붓쇼잔 온천, 코토히라 궁
"나 저번에 일본 갔다 왔어"
"어디?"
"타카마쓰라고 크게 유명하진 않은 곳인데..."
"그게 어디야? 처음 들어봤어"
"거리는 오사카와 후쿠오카 사이쯤 되는데, 시코쿠에 있어"
"시코쿠는 어디야?"
일본은 크게 4개의 섬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장 남쪽인 큐슈, 가장 북단인 홋카이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혼슈, 그리고 이 혼슈와 큐슈에 싸여있는 듯한 시코쿠가 있다. 큰 섬들 중 가장 작은 시코쿠를 둘러싸는 폭이 좁은 바다가 있는데, 여기를 세토내해 (세토나이카이)라고 한다. 그 세토내해와 접하고 있는 시코쿠의 고즈넉한 소도시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타카마쓰이다. 행정상으로는 카가와에 속하며 도쿄, 교토, 오사카 그 어디와도 가깝지 않고 조용히 떨어져 있는 이 작은 도시는 예전에는 사누키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사누키 우동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일본인들에게도 우동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지만, 사실 우동 이외에도 자연, 정원, 예술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카마쓰에 내리니 일반 건물 3층 크기의 아주 작은 공항이 있었다. 크기는 시즈오카 공항이랑 거의 비슷하였고, 규모는 김해 공항 보다도 작았다.
작은 공항을 나가니 바로 앞에 타카마쓰 시내로 가기 위한 버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온천을 아주 좋아하는 나는 온천에 가기 위해서 구글맵을 보고 시내를 가는 길 중간에 내리기로 하였고, 이치노미야라는 곳에서 내렸다. 막상 내려보니 논밭, 그리고 드문드문 인가들이 있는 한적한 일본 시골이었다. 가려는 붓쇼잔 온천이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닌지라 이 시골길을 따라 20~3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걷다 보니 일본 특유의 정겨운 골목길이 나오는데, 그러면서도 나름대로의 예술성을 담았다고 느껴지는 건물들이 많았다. 어떤 주택은 멋들어지게 기와를 올리기도 했고, 어떤 집은 시멘트와 나무를 잘 활용하기도 하였다. 때때로 핀 색색의 수국이 조용한 이런 예술적인 동네 건물들과 몹시도 조화를 잘 이루었다. '자고로 건물은 이렇게 설계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붓쇼잔 온천이 있는 붓쇼잔 쵸에 들어가니 몇몇 건물들은 정말 시간이 30~40년 전에 멈춰버린 듯했다. 나보다도 오래되어 보이는 교복 가게도 있었고, 정말 로컬 사람들이 이용할 것 같은 오래된 미용실도 있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니 사람 하나 겨우 천장에 머리 박지 않고 들어갈만한 협소한 우동집이 있었는데, 구글평점을 찾아보니 4점이 넘었다. 도대체 여기는 뭔가 싶어서 들어갔는데, 외국인은 한 명도 없고 옆에서 공사 작업을 하던 아저씨들이 와서 점심으로 우동을 먹고 있었다. 정말 로컬 맛집인 듯했다. 카운터 옆에는 제면기가 있고 아줌마 한 분이 열심히 면을 뽑고 있었다.
자루우동을 시켰는데 가격이 220엔이다.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너무 싸서 오뎅 하나, 유부 하나도 같이 주문했는데 그래도 400엔이 넘지가 않았다. 뭔가를 추가로 더 시켰는데 4000원이 안 되는 값으로 한 끼가 가능하다니! 우동의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삶아서 따로 얹은 자루우동과 음식점 물컵보다 조금 더 큰 다시 (육수) 그리고 약간의 와사비. 아무리 그래도 야채같은게 조금은 들어가야 육수 맛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지 않나 의심이 생겼다. 그나마 실파만 아주 약간 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동을 육수에 찍어서 한입 먹는 순간 그런 의구심이 싹 사라졌다. 면이 너무 탱탱하면서 탄력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먹어본 그 어떤 우동보다도 이 220엔짜리 우동이 압도적으로 더 맛있었다. 육수는 간장 베이스인 것 같은데, 적절하게 진해서 굳이 육수와 면을 섞어서 끓이지 않아도, 찍어먹으면 적절히 간이 배어있게 되어있었다. 속으로 감탄하면서 연신 '말도 안 되는 맛이다. 내가 지금까지 먹은 우동은 뭐였지?'라고 생각하면서 먹었다. 괜히 이런 허름한 집이 평점을 4.0 이상 받진 않은 것 같다.
배를 채우고 10분 정도 붓쇼잔을 조금 더 걸어서 '붓쇼잔 온천'에 도착했다. 꽤 유명한 온천이라 허름할 줄 알았는데 외관도 내관도 현대적이고 굉장히 깔끔했다. 네모난 나무 프레임에 유리창으로 되어있는 꽤 예술적인 건물이었다. 들어가 보니 로비에는 굉장히 길고 깔끔한 복도가 나있었고, 오른쪽에는 중고서적, 왼쪽에는 일본식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복도를 쭉 따라가서 목욕탕에 입장하보니, 처음 보는 아주 신기한 구조였다. 일단 가운데에 떡하니 나무로 꾸며진 정원이 있었고, 정원을 둘러싼 사면에 탕과 샤워실이 있었다. 그러니까 샤워를 하든, 목욕을 하든 이 중앙에 있는 정원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나무들이 꾸며져 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목욕을 하니 정말 극락이 따로 없었다. 이런 목욕탕이 동네에 있다면 정말 매주 적어도 한 번은 방문했을 것 같다. 그런데 더 좋은 점은 동네가 꽤나 시골인지라, 사람들도 북적거리지도 않았다.
목욕을 하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옆에 젊은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젊은 사람은 대꾸를 못하는데 한국인이었다. 여행 첫날이긴 하다만 이 시골에 한국인이 있는 것이 반가워서 말을 걸었고, 꽤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여행 막바지인지라 타카마쓰뿐만 아니라 여자친구와 시코쿠의 여기 저리를 이미 많이 다녀왔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은 먼저 나갔는데, 서로 즐거운 여행을 빌어줬다. 혼자 조용히 목욕을 즐기고 있는데, 이번에는 아까 그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거신다. 이 할아버지는 외국인에게만 말을 거시는 재주가 있는 건지… 그래도 나도 현지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재미있게 얘기하였다. 할아버지의 따님이 중국 웨이하이에 살고 있다는 것도, 서울에 가본 적이 있으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분 좋게 온천을 하고 왔는데, 첫날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세차게 쏟아지는 것은 아닌지라 그냥 맞고 갈까 싶어서 비가 조금이나마 소강되길 기다렸다. 아까 봤던 복도 왼쪽에 일본식 정원을 볼 수 있는 좌탁이 구비되어 있어 가만히 앉아서 정원과 비 구경을 했다. 주변도, 마음도 조용해졌다.
비가 그나마 멎어서 가방을 메고 다시 움직였다. 아까 지나쳤던 붓쇼잔역을 들러서 코토히라선을 탔다. 대부분의 여행지와 타카마쓰 중심가는 붓쇼잔 온천에서 20분 정도 위쪽 방향에 있지만, 유명한 일본 사찰이 있다기에 시내와 멀어지는 서쪽으로 움직였다.
코토히라선의 끝 역인 코토히라역에 내리면 상당히 규모가 있는 코토히라궁이 있는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역 주변에 비는 세차게 내리고, 주변에 우산을 파는 곳은 없었다. 역 바로 맞은편에 가라아게를 파는 노점이 있어서 그쪽으로 일단 힘차게 뛰었다. 그런데 뛴다 한들 뭐 달라질 것은 없고, 비가 멎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가라아게를 주문했다. 내리는 비를 보면서 천천히 가라아게를 먹었다. 하교 시간인지 학생들이 하나둘 우산을 쓰고 역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5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비가 어느덧 그나마 잦아들어서 주인할머니에게 편의점이 있는 곳을 묻고, 얼른 편의점까지 이동해서 우산을 샀다.
다행히도 우산을 사러 가는 방향이 신궁으로 가는 방향과 같았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신궁까지 가려고 보니 계단이 꽤 많아 보였다. 계단이 시작되는 인근에서는 지팡이를 대여해 주는 곳도 몇몇 보였다. 계단을 걷는데 지팡이까지 필요한가 싶어서 걷다 보니 정말 이제 도착인가 싶을 때 또 계단이 나타나고, 도착인가 하면 다시 계단이 나타나는 과정을 몇 번인가 반복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계단의 수를 알아보니 1368개나 되었다. 그래도 계단을 걷다 보니 상점가 역시 양쪽에 끝없이 있어서 가는 길이 그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았다.
드디어 대문 같은 곳에 올라오니 큰 건물이 보였는데, 여기가 본전 입구인 듯싶었다. 그런데 4시 반이 넘어서 그런지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일본의 사찰은 4시 반이면 닫는 곳이 많다) 굉장히 어렵게 올라온지라 허탈한 기분이 들었는데, 보아하니 박물관 같은 곳이었고 다른 건물들이 뒷길에 더 있었다. 뒷길을 통해서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올라오니 일본풍의 여러 웅장한 건물들이 있었다. 여기에 건물들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싶다만, 일본 신사 구조에 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건물들의 용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이곳 고토히라 궁은 바다의 신 '곤피라상'을 모시는 곳이라고 하는데, 인도의 신인 '꿈비라'가 일본에 들어와 토착화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토속신앙은 다신교라 그런지, 다른 나라의 신을 몇몇 추가하는 것쯤은 그다지 거부감이 없나 보다. 신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니 일제시대 때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도 애당초 단군을 같이 모시려 한 논의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내의 수많은 곤피라상의 신사들 중에서 이 사누키 고토히라궁이 곤피라상을 모시는 신사의 총본산인데, 외국의 신이 일본으로 넘어오고, 그 신을 모시는 사찰이 이토록 거대해진 것이 흥미로웠다.
계단을 오르느라 꽤나 힘들었지만, 고토히라궁에서 산 너머를 보니 타카마쓰가 속해있는 카가와의 경치가 잘 보였다. 비가 내려 약간 안개 같은 것이 끼었다만 오히려 신사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거대한 건물들을 구경하고, 다시 내려오려 보니 내려오는 길에 양쪽에 절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진 비석들이 있었다. 새겨진 금액은 대개 백만 엔, 이백만 엔이었다. 새겨진 연도는 쇼와 50년쯤 되었고 (1975년), 어떤 갑부들이었는지 잠깐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였다. 더 내려오려고 보니 거의 6시가 되어 어둑어둑해지려 하고, 계단옆 가로등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다행히도 많이 그쳤다.
내려와서 게스트하우스를 가기 위해서 코토히라 역에서 하나조노 역으로 이동했다. 역에서 7분쯤 걸어서 '와카바'라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는데, 사장님이 참 성격이 좋고 순박했다. 말에서도 묻어 나오고, 얼굴에서도 순박함과 친절함이 묻어 나왔다. 1층에는 사장님과 부인, 그리고 아이들도 같이 사는 것 같았는데, 꼬마 남자애가 한 명 뛰어나오더니 나에게 보리차를 대접했다. 귀엽다는 생각, 참 화목한 가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짐을 풀고 저녁 시간이 그냥 가는 것이 아쉬운 지라, 사장님께 추천받은 이자카야를 혼자 갔다. 이전에 시즈오카에 갔을 때 동네 이자카야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좋아서 꽤 기대를 하고 갔다. 안타깝게도 이번에 간 이자카야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고, 한 두 명이서 조용히 한잔 하는 분위기였다. 누군가 말을 좀 붙여줬으면 했는데, 그런 일은 없어서 혼자 맥주 한 잔, 하이볼 한 잔을 하고, 카가와의 명물인 호네츠키도리를 시켰다. 직역하면 뼈 있는 닭고기인데, 어쩜 이렇게 고소하고 바삭하면서도 야들야들하게 구웠는지 정말 맛있었다. 다만 혼자인지라 그리 긴 시간을 있지 않고, 다시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