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숨>

Dusvlf No.1

by Dusvlf





날숨







dusvlf


숨을 뱉어 내자,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처음 쓰는 수필에 야금야금 한 글자씩 갉아먹는 감정은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무엇을 그렇게 뱉어내고 싶었을까.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할까. 생각하려 하지 않던 기억을 끌어올리자 속이 역해진다.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시원하게 게워 내면 무언가 달라질까. 아니면 가만히 소화되게 놔둘까.


지금이 밝을수록 옛날은 더 또렷해진다. 물 빠지지 않은 장화 속 냉기처럼, 숨이 닿는 자리마다 얼음이 얇게 잡히는 것처럼. 노을이 뭉글해질수록 손끝의 소금기는 더 쓰리다. 칼을 갈자. 칼을 갈아, 날카롭게 칼을 갈아. 나무를 하나아, 두울, 세에엣 찍어 내려 무너뜨리고, 그 위를 밟고 근사한 집을 지어 보자.


사회의 첫걸음


-김 공장-


12시 30분. 사장님은 항상 이때 대기하라고 하시고는, 항상 15분쯤 늦게 승합차를 몰고 온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나는 맨 뒷좌석에 앉는다. 그러고 나면 할머니들이 같이 차에 타면서 이런저런 트로트 노래를 틀고, 신나게 같이 이동한다. 물론 나는 그 할머니들의 트로트, 잔치 분위기가 흥겨웠다. 그래도 나는 이어폰으로 굳게 닫고 먼 산, 먼바다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도착하면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는다. 축축한 건 어제 물을 빼지 않고 집에 돌아간 일 때문일 것이다. 축축한 물기는 후에 발을 소금에 절인 마냥 고기가 되게 하니, 빨리 물을 빼야 한다. 그런 다음 목장갑을 장비하고 박스를 나른다.


조와 까르 같은 태국인 분들이 식사하고 계시면, 나는 밀린 상자를 다시 쌓아놓고 인사를 한다. 늘 그렇듯 태국인 분들은 친절하시다. 이런저런 민망한 농담도 한다. 농담이라는 걸 받아들이면 쉽게 해결될 문제다. 그리고 한국인 김 씨는 내가 인사해도 쳐다보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처음에는 아쉬웠지만 그것이 그 나름의 인사 방법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차가 오면 나는 장갑을 한층 더 껴입는다. 물건이 오면 1시간 동안은 체력적 사투를 벌인다. 으쌰 으쌰보다 “어이, 어이…” 하면서 곡소리가 난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어리바리한 채로 이해할 수 없는 현장에서, 2층 높이쯤 되는 곳의 파이프를 잠궈오라는 지시를 받았고, 나는 손 한 뼘 정도 되는 외벽 위를 짚어가며 파이프를 잠갔다.


첫 출근 때의 야근은 조금 신선했다고 해야 하나. 불어 터진 짜장면이 저녁으로 나오고, 화물이 도착해 올라가면 찬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쯤 바닥의 물기가 점점 딱딱하게 얼어가고 있었다.


손끝이 터져 나가고 손톱이 갈라지기 시작할 때 “테이프를 감으라”라고 조언하던 선배님이 생각난다.


그분은 마칠 때마다 나를 태워다 주시며 “월급 받으면 도망가라”라고 하신다. 밤이 되었을 때 “새벽에 다시 김 부으러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터져 나온 험한 말, 쭉쭉 밟히는 액셀은 그의 화를 짐작게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오지 말라고 한 그분이 정말 고마웠다.


그런 체력적 사투 끝에는 박스 나르기가 다시 반복된다. 박스는 20kg짜리 상자로, 5층으로 쌓아야 한다. 5층 정도가 되면 머리 위로 들고 던져 넣어야 한다.


일이 없는 쉬는 시간 때면 어른들은 휴대폰 게임, 주식에 삼매경이다. 꽤 재미있는 듯 보였다. 정말 일 외에는 그것밖에 하는 게 없기에, 나는 다른 할 일이 없는지 찾다가 개밥 주는 것을 알아차리고 개 3마리에게 달려갔다.


개한테는 독특한 이름—마이클, 잭슨, 미셸—을 붙여주었다.


그중 마이클은 나이가 많이 들어 병을 앓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안쓰러워 밥을 많이 챙겨주고 놀아 주었다.

잭슨은 나를 보면 항상 꼬리를 치며 밥 달라고 소리치는데, 그럴 때마다 이 녀석이 앉으면 소시지를 던지는 식으로 놀았다. 완전히 나를 좋아하며 꼬리 치기에 마음에 드는 친구다.


미셸은 똥을 많이 싼다. 엄청 냄새도 나고 밥도 엄청 먹는다. 내가 출근하기 전에 탈출한 적이 있어 개를 잡으러 다니고, 다시 묶었다고 한다. 정말… 그래도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길래 밥을 다시 주기로 했다.


그렇게 차가웠던, 뭉툭했던 손 뒤에는 따뜻했던 손이 남고, 벌었던 돈을 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어폰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학교 다닐 때 줄 이어폰을 끼고 다녔지만, 어느 새부터 친구들이 에어팟을 끼고 오기 시작했고 나는 자연스레 줄 이어폰을 쓰지 않고 혼자 재미없는 길을 걸어야 했다.


그때 잃었던 음악을 보충하기 위해 음악실 선생님께 부탁해서 매일 점심마다 자습 시간을 째고, 동아리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혼자 나를 달랬다. 그것마저 없으면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내 인생은 무료함으로 가득 차 힘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 동아리 부원들은 가끔 찾아와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보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 아이들은 내가 자기네들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되게 이상하다 여겼을 것이다. 난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집에 퇴근하고, 피곤해서 잊었던 피아노를 쳐보기로 한다. 건반에 송곳이 달린 듯 날카로운 통증은 날카로운 피아노 소리로 들리고 내 귀에도 고통이었다. 다시 천천히 피아노를 달래 보지만 손이 아팠다. 하지만 그래도 쳤다.


손 아픈 것쯤이야 상관은 크게 없었다. 다만 일 끝나고 마주한 것은, 수능이 끝나고 게임하는 친구들, 술 마시러 놀러 다니는 친구들이었다. 그냥저냥 연락할 친구들은 게임에 삼매경이기에, 나는 음악을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때의 음악과 밤 풍경, 차가운 공기는 무엇인지. 이런저런 결심을 하고 혼자 흥얼거리다 보니 5주째 되는 정도에 일은 끝나간다.


거기서 일하시는 어른에게 간혹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보기에 내가 너무 민망했고, 내가 너무 초라했다. 나는 이것을 아주 조금만 겪어 보고 그들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힘들지 않으냐”라고 묻는 건 위선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한 분씩 인사를 드리며 이런저런 이유로 나왔다. 계좌에 꽂힌 것은 110만 원. 시급 8,000~9,000원 정도로 사장님은 아마 순수하게 일한 시간만을 책정한 것 같다. 작업을 마치고 30분 정도 쉬는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가 보다. 그렇게 마지막 트럭에 몸을 싣고 간다.


통장에 꽂힌 돈을 바라보며 계속 생각했다. 얼음이 녹으며 땅을 적시는 것을, 날씨가 풀리고 해가 길어지는 것을. 다 같은 시간에 행을 이루는 차를 보며, 신호 하나 차선 하나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것을. 버스정류장에 매연을 맡으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현수막에 노동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보며 정작 그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했을지, 또는 내가 생각한 위선이 들었는지 의문이 들면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본다.


힘들게 일한 만큼 얻은 돈은 값지며, 누구나 할 수 있는 힘든 일은 값이 싸다는 것을. 어쩌면 집에 가는 뭉글뭉글한 노을을 보며 떠올릴 수 있을까.


-선거-


처음 쓰라리게 번 돈을 끝으로 나는 다른 길을 찾아 떠났다. 마침 때가 좋아 대통령 선거 운동 알바를 하면서 여러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고, 운동원들, 비서관들과도 접하게 되었다.


아직은 많이 춥고, 해가 일찍 지는 겨울과 봄 사이. 새벽에 일어나 고가 도로 위로 장갑과 옷을 껴입고 출발한다. 그곳에 가면 내가 먼저 도착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따금 찾아온다. 그러면 준비된 노래와 함께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90도로 인사를 하며 몸을 데운다.


그렇게 아침 인사가 끝나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를 뽑아 달라며 인사를 드리곤 한다. 이래저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다니고, 걷는 것도 꽤 익숙해진 것 같다.


교차로에서 내가 팻말을 들고 서 있으면 자동차가 지나간다. 나를 향해 울리는 클락션 소리는 생각보다 강했고, 강하다고 생각했던 나를 침울하게 만들고 놀라게 했다.


면전에 대고 하는 경적 소리는 분노가 느껴지기도 했다. 또는 굳이 내 앞에서 풀액셀을 밟으며 힘차게 날아가는 분들을 보는데, 이럴 때마다 내가 들고 있는 인물에 분노하는 건 알지만 막상 내가 직접 들으니 서운하게 느껴진다.


어떤 때는 자동차 유리창을 통해 나에게 손가락 욕을 날리는데, 나는 그것에도 인사를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 적이 있었다. 뭐랄까… 조금 서운한 느낌이 맴돌았다.


나는 그때부터 표지판이 돼버린 것이다. 내가 입고 있는 마스크를 향해 욕을 날리며, 나는 인사한다. 도로 위의 광고들, 표지판의 심정을 조금은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길거리를 돌아다녔을 때 “한 번 더 만나면 죽여버린다”는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많이 놀랐다. 한 50대 정도 되는 분이 그런 소리를 하신다. 하지만 60~90세 정도의 어르신들은 손자처럼 대해 주시고 힘내라고 응원해 주신다.


가끔은 초등학생이 “나는 ~ 뽑을 거야”라며 당돌하게 지나가는데 그때가 너무 웃겨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러한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조롱을 하는 경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하는 경우, 찾아와서 건드리고 돌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영국 왕실 근위병 같은 느낌이 든다. 욕설과 조롱에는 개의치 않으려 한다.


10번 중 8번은 조롱하는 분들을 만나지만, 그중 2번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 다시 나를 표지판이 아닌 사람으로 복귀시키는 듯하다.


간혹 같은 당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더 열심히 하라며 혼을 내고 가기도 한다. 죄송하다며, 열심히 하겠다고 인사를 드린다. 간절한 것이었고, 나는 그걸 알아챈 것뿐이라 감정은 딱히 없었다.


고등학생들이 지나갈 때 파이팅이라 외치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후배라 그런지 아는 얼굴이 몇몇 보인다. 이 친구들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아 조금 위안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일을 끝마치면 가족 같은 분위기의 팀원들이 수고했다며 서로 칭찬해 준다. 내가 유일하게 20살, 다른 한 분은 26살, 나머지는 친근한 아주머니, 할머니였다. 이런 따뜻함은 사회에 나와서 더 크게 느껴진다.


26살 누님은 춤을 잘 추셔서 앞에서 춤을 추면 나는 그걸 따라 한다. 일을 열심히 하기에 나도 욕심이 생겨 그 누님과 맞춰 나가려고 하니, 힘들어 죽을 것 같았고 내 체력은 바닥났다. 그럴 때마다 수고했다고 해주시니 감사했다.


밖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니 느껴본 적 없는 친절함, 가족 같은 분위기에 세상이 굉장히 따뜻한 것을 느꼈다. 아주머니, 할머니는 나에게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준다. 또 많이 먹으라고 하며 맛있는 것도 주신다. 아주머니들 농담은 재미있고, 수다 떠는 것을 보는 것도 어느 정도 재미있다.


구의원님은 나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려 노력하신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저런 좋은 말들, 조언을 해주신다. 또 지역 사정이 어떤지 이야기해 달라고 하셔서, 잘은 모르지만 조목조목 이러이러하다고 이야기하니 알겠다고 한다.


다른 지방선거 후보분들도 같이 일을 도우시면서 힘이 돼준다. 차가 없는 나를 태우러 와주시기도 하고, 음료수도 주시는 게 따뜻하다고 느꼈다.


국회의원분과 구의원분들, 시의원, 보좌관 분들이 나를 칭찬하면서 내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게,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되게 들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못하냐는, 대충 하냐는 지적에 나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고, 끝에는 인정받으면서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후에 술자리 회식 때 내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했다는 큰아빠의 전화 통화에 꽤 기쁜 듯이 말을 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했다.



처음에 번 돈으로 이어폰을 가지면서, 나는 동아리 꼬맹이들을 데리고 같이 녹음실로 향했다. 항상 밤마다 머릿속에서 흘러가는 멜로디와, 항상 육성으로 울부짖으며 집에 돌아가는 새벽 1시의 생활은 2년 동안 마주 보는 달과 함께하니 정서가 뚜렷하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만들기로, 세상에 들려주기로 결심하고 아이들에게 부탁하니, 그걸 처음엔 학교 공연에 연주하고, 녹음실로 향하게 되었다.


12시간 넘게 진행된 녹음과 4시간가량 수정한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사실 노래가 뜨길 바란다기보다, 내가 계속 듣고 싶고 아이들과 졸업 전 추억을 남기고 싶은 소망이었을까.


투자한 돈 70만 원은 전혀 아깝지 않았고, 20만 원은 꼬맹이들에게 수고했다고 소고기로 보답하는 것이 굉장히 보람찼다. 아이들에게는 장난처럼 김 공장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지만, 많이 힘든 그런 일들을 재미있고 담담하게 풀어내는 데에는, 저린 손끝이 계속 욱신거려도 좋은 추억을 만들었기에 참았다.


선거 운동도 일이 끝나면 만보기에 3만 보씩 찍혀 있고, 땀범벅이 되어 돌아오니 마침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축하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세상은 따뜻하다는 것, 열심히 하며 인정받는 느낌을 나는 받았다.


그리곤 165만 원이 입금되면서 2주간 고생한 나를 토닥이며 살아갔고, 나는 그간 일을 끝마치고 나에게 써 볼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마침 과외도 하고 있었고, 그 친구가 열심히 따라와 주고 있는 것에 굉장히 기뻤다.


어느새 통장을 보면 이번 달 수입은 200만 원이 찍혀 있었다. 내가 나온 학교를 알리면서 그 학교에 내신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 내가 수능 영어 영역을 1개 틀렸다는 것으로 광고를 하고 다니면서 과외생을 건졌다. 그리고 그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니 다른 곳에서도 좋은 소문이 들리며, 과외생의 수는 점차 늘어 나갔다.


가르치다 보면, 하면 할수록 강의력은 올라가고 거기에 연구도 활발히 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치고, 어떻게 하면 이 학생에게 맞을까를 고민하며 교재도 제본해서 수업하고, 따로 지문을 뽑아 연습시키는 등등. 이제는 단순 알바를 넘어서 정말 진심으로 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지칠 때가 있지만, 내가 번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었다.


어릴 때 항상 동경하던 것을 해보기 시작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분위기 있는 술을 마시는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것. 처음 돈을 번 것으로 이어폰을 샀었는데 그 후론 거리가 즐겁다. 음악과 함께 거리를 거닐면 주인공이 되는 것 같으면서, 거리에 색채가 씌워진다.


어렸을 때 부모가 선물을 사준 적이 없었고, 딱히 바라지 않았다. 유치원 때부터 뭐를 사달라고 떼쓰지 않았다며 대견하다는 부모 앞에서, 속으로는 그게 부모가 준 무언의 눈치 때문이라는 것을 꾹꾹 참았으며, 남들 하는 투정을 나도 해봤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제대로 된 외식을 나간 적은 없으며, 무엇을 사 먹을 때나 같이 놀아본 기억이 없기에, 내가 커피를 사 먹는데 “돈 아깝게 그걸 왜 먹냐”며 믹스 커피를 타시는 것을 회상한 후에, 다시 손에 아이스커피 하나를 들고 집으로 간다. 플라스틱 컵 벽에 물방울이 맺히고, 빨대 끝에서 단맛과 쓴맛이 함께 올라온다. 그 한 모금이 내가 번 돈의 온도 같았다.


참, 영화관에 갈 때는 영화 티켓 값이 비싸졌다는 이유로 티켓 암거래를 굳이 이용해 싼 가격에 산 것을 좋아하는 부모를 보며, “싼 가격에 살 수 있는데 왜 하지 않냐”는 반문에 말을 멈추었고, 영화관에서 팝콘 사는 것을 망설이시는 것을 회상하며, 혼자 영화를 보기 위해 팝콘을 사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었다. 봉지를 움켜쥐면 따끈한 기름 냄새가 손바닥으로 번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전까지 바삭한 소리만큼은 내 편이 된다.


스테이크는 냉동 함박스테이크를 먹은 기억밖에 없어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졌고, 먹으러 갔다. 고기는 이런 맛인지를 안 것은 굉장했다.


하고 싶으면 이제 할 수 있다. ‘내가 벌고 내가 쓴다.’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얼마나 지독했던 것들을 떨쳐내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와인이 궁금하고 멋있어 보이기에 무작정 와인바로 달려간다. 사장님은 친절하게 이러저러한 와인을 소개해 주고 가르쳐 주신다. 잔을 흔들면 유리 벽에 붙던 향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코끝에서 낯선 과일 냄새가 맴돈다. 혀끝에 남는 떫음이 이상하게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렇게 음미를 하면 정말 재밌는, 조금 더 깊게 즐기게 되는 것이 재미였다. 갈 때마다 새롭고 기분이 좋아진다.


술을 마시고 외국인과 놀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또 달려간다. 즐겁게 논다.


어쩌면 이러한 자유가 너무나 고마워서, 방앗간을 나온 말이 평야를 어디까지 달릴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처럼 계속 달려간다. 그런데,


내가 돈을 잘 번다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어떠한 경제적 지원도 해주지 않겠다는 부모의 말을 들은 나는 어떠한 공포감에 휩싸이면서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빼야 할 지출을 다 빼고, 갑자기 그만둔 과외생과 더불어 찾아온 폭풍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무작정 그렇게 말하니 기가 차고, 나는 영영 누려 볼 수 없는 처지에 있는지 생각이 들어 억울함이 찾아왔다. 다시 그 이전 생활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에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살아온 것을 순식간에 토로하게 되자, 또 시작되는 데자뷔 현상에 나는 집을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잠시 내 능력을 다시 확인하고는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갑자기 모든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좋아”라는 문구를 장난식으로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은 실로 통찰력 있는 말인 듯싶었다. 말은 더 이상 마구간을 쳐다보지 않는다.


고3의 3월, 아버지의 입에서 OO전자 주식이 나오고 이러저러하다면서 어머니를 설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뉴스를 보니 그 회사에 관한 정보가 계속적으로 올라오고 있고, 부모는 부산하게 움직인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아버지는 여름휴가 1달 전체를 노트북으로, TV로는 주식 뉴스를 틀어 놓으시면서 거실에서 꼼짝하지 않으셨다. 내심 속으로는 1달짜리 휴가를 멋지게 보내면 어떨까 하면서 기대를 하지만, 그 자세 그대로 이제는 휴대폰까지 계속 들여다본다.


대학 원서를 서울권으로 넣겠다고 하자, 보낼 돈이 없다고 하는 부모를 보며 내가 무엇을 했는지 꽤나 까먹게 되었고, 언변 능력으로 아버지의 이러이러한 점, 어머니의 이러이러한 점을 신랄하게 이야기를 한다.


동생은 내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 불편하다는 기색을 그대로 나한테 일러주듯 방문을 세게 닫았으며, 내 눈은 더욱 또렷해지면서 결국 아버지는 앉아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후에는 눈물을 터트리며 나를 안아준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아버지를 처음 봤지만 별로 상관없었고,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나보고 나쁜 놈이라 욕하니 꽤나 아이러니하며, 더욱 분명해졌다.


겨우 내 앞에서 이렇게 분노하고 무너져 내리는 부모 앞에서 꽤나 허탈했다. 떼를 쓸 수도 없는 상황에 그냥 부산 쪽에 원서를 넣겠다고 약속을 하며 그대로 집을 나왔다.


연락할 사람은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집에 다시 새벽에 들어가니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데자뷔 연극을 했는지 까먹게 됐다.


후에 대학 생활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와서 다시 회복했다면서 신나 하시는 것을 보니, 그때 집에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모아 주식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거기에는 내 대학 등록금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 나는 어떤 구름을 그리고 있었는지 하늘을 뒤져 볼 뿐이었다.


가족, 어린 시절


-회상-


“선생님, 저희 가족이 자주 가는 식당이 있는데 거기 스테이크 정말 맛있어요. 먹으러 가봐요.”


그 한마디와 가족끼리 웃음이 끊이지 않는 집안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부러웠다. 다른 가족을 살면서 처음 바라보았을 때, 가족과 친구처럼 지내는 분위기는 살면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 맴돌았다.


나는 그 학생에게, 고등학생 때 이렇게 사이가 좋은 가족이 있다는 게 부럽다며 밤에 같이 산책을 나왔을 때 한마디 건넸다.


또 과외를 하며 초등학생 아이를 수업했을 때, 그 초등학생이 선을 넘고 어머니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그러자 그 어머니의 반응은 놀라웠다. 정말이지 침착하게 아이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선생님, 일단 수업해 주세요.”라고 하시면서 눈웃음을 건넨다.


그때 모두 그 어머니의 슬픈 눈을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이 아이의 나이가 12살인 것을 생각해 보면서, 나는 12살에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면서…


12살 나이에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 이전에 살던 곳은 아버지의 공장에서 잠시 빌려주신 시골집이었는데, 거기에서 시내까지 나가려면 무조건 자동차를 타야 했고, 그래서 아침마다 공장 직원분이 태워주는 트럭에 타서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가면 학교 일과를 마치고, 방과 후를 마치고,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영어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를 마치면 그때 저녁 9시가 되어 태권도 관장님이 나를 시골집까지 태워다 주신다.


아이가 말했다. “저희 엄마는 저한테 자꾸 뭘 시켜요. 저는 놀고 싶어요.”


그 아이도 여러 학원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집에 왔을 때,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짐작한 듯—아니, 그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을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그 아이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내 부모는 단지 일할 시간 동안 나를 맡길 장소가 필요했던 것뿐이었고, 나는 그냥 하루를 그렇게 보내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다음 주에 어디 놀러 간다며?”라고 하니 캠핑을 간다고 한다. 저번에는 제주도였지만 또다시 놀러 가고, 되게 자주 어디를 놀러 다닌다.


10살 때 나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과 나는 할머니 집에 9일 동안 있게 되었고, 그때 아버지, 어머니는 둘이서 하와이 여행을 다녀온 사실을 다시 기억하면서, 그것이 생각보다 새로웠던 기억이 되어버렸다.

초등학생 어머니와 술을 한잔 한 적이 있었는데, 본인이 일하면서 아이와 시간이 없다는 것, 그래서 시간을 내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진심을 나에게 말했다.


그 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무례하게 군 것이 맞고, 그걸 사과해야 한다.”라고 하니 싫다고 투정 부리기에, 정말 진지하게 말했다.


“사과하기 싫어도 나중을 위해서 하는 게 좋다. 지금 아니면, 내가 가고 나서 더 혼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아니면 앞으로 영영 사과하지 못하게 될 거야.”


라고 말하니 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말이 맞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님,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니, 어머니는 아이의 사과를 받고 그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신다. 너무 속상했다면서.


그렇게 다시 수업을 들어갔을 때, 나는 이 아이가 나와는 다르게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펜을 잡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픔-


12살에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오고 나서 다른 아이들의 이유 없는 텃세가 시작되었다. “저 친구는 창원에서 왔으니까 창원으로 부르자.” 하며 나보고 “야 창원” 이러면서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렇게 부르더니 결국 성깔 때문에 내가 덤비라고 소리쳐 화가 벌어졌는데, 그때 애들 단체로 우르르 따라나서서는 나를 공사장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때 반 애들 다 나를 둘러싸며 나를 주로 괴롭힌 그 친구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온갖 욕이 난무하면서 분위기는 험해졌는데, 나를 갑자기 주먹으로 한 대 치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다시 치려 하니 주변 아이들이 막아서다, 도망치다, 결국 다 사라졌다.


반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 케이지처럼 둘러싸면서 조성한 긴장감 끝에 겨우 한 대 맞았다고 하니 꽤 어이가 없었고 억울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에게 말했는데, 그 끝에는 수업 시간 도중 나를 교탁에 세워놓고 “나를 때린 사람이 누구냐, 손 들라”라고 하기에 그 친구는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누가 먼저 때렸느냐”는 질문에 내가 먼저 때렸다고, 다른 친구도 그걸 봤느냐고 하기에 내가 먼저 때렸다는 다른 친구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손을 드는 광경에 선생님은 “뭐가 문제냐”, “네가 먼저 했다는데 왜 난리냐”면서 일이 끝났다.


나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말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꼈고 굉장하게 울었다. 너무나 무서웠고, 약했다.

우울한 12살을 지내고 13살에는 눈빛이 달라졌다. 눈매는 날카로워졌고, 정확해졌다. 사실 잘못된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눈이 생긴 듯,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어머니, 아버지가 나에게 책 읽고 글을 한 편 쓰라고 하신다. 그리고 왜 쓰냐고 물으니 이유는 묻지 말고 쓰라고 한다. 무엇인가 느껴졌다. 그래서 왜 쓰냐고 다시 물었다.


잘못된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왜 반항하냐고 한다. 그냥 하라면 하지 왜 토를 다냐고 한다. 결국 추궁 끝에, 그냥 글을 쓰기만 하면 상을 나에게 준다는 사실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안 한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물건을 던지며 안 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사춘기가 왔냐면서 나를 조롱하는 것을 보며, 나에게 시발놈이라며 욕을 하는 것을 보고 날카로운 눈매는 다시 약해져 갔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기회는 없을 줄 알라는 말에, 이것을 기회로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절대 쓰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약속한 마감일이 다가오자 책상에 앉아 글을 급조해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겨울날, 상을 받으러 오라는 말. 담임 선생님에게 축하받으며 상을 받는 행사에 가게 되었다.


나는 거기에도 안 가겠다고 했지만, 안 가면 집에 내쫓을 거라는 것, 안 가면 내 아들이 아니라는 말 때문에, 거기서 나는 최우수상으로 그 글을 읽었다.


연단 위로 올라간다. 주변 어른들의 박수가 쏟아진다. 올라가서 보니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내가 쓰지도 않은 글을 읽는다. “저는 ~을 읽고 ~해서 ~했습니다.”


읽은 내용은 무의미하며 소리 내서 읽지만, 그것은 그냥 꽥꽥 거림이었다.


상을 받고, 그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과 결국 느껴지는 무력감, 모멸감이 13살에 나를 덮쳤고, 눈은 더욱더 정확해져 가고 있었다.


설날이 돼서야 가족들이 할머니 집으로 다 찾아왔을 때, 다른 삼촌, 가족들이 나에게 찾아와서는 어떻게 어머니에게 그렇게 반항할 수 있냐며 나를 나무랐고, 나를 한 곳에 앉혀두고 나에게 이런저런 화를 내는 것이었다.

모든 어른들이 나에게 쏘아붙이는 지적에 나는 통찰력을 얻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후 맥락을 잘 모르는 것 같았고, 나는 그냥 넘어갔다.


이제 내 눈은 잘못된 것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상황도 보았고, 화를 내야 할 상황, 아닐 상황까지도 그려지기 시작했다. 대화가 통할지 안 통할지도 보이면서, 믿을 것은 나 혼자밖에 없다는, 본인이 하는 행동에 뚜렷한 확신만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한 확신을 하고, 나는 사색에 잠기기 시작하면서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를 당하는 애가 있었고, 그 아이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국어 수업시간에 같은 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반 아이들은 나에게 왜 같은 조가 됐느냐고 말했다. 반 아이들 전부 나에게 안 됐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많이 힘들겠다”는 위로의 말을 수업시간 중에 하면서, 그 아이에 대한 모욕적인 말들, 여러 희롱을 뱉어 내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날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왜 이 친구를 괴롭히느냐, 그리고 왕따를 당하든 말든 그게 왜 “나한테 힘들겠다”는 말을 하느냐, 나는 어느 사람이랑 같은 조 돼도 잘할 자신 있다, 개 같은 말 하지 말라는 마무리와 함께 손발은 너무나도 떨려간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 친구를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진짜 천박하다고 말하는 도중 국어 선생님의 중단 끝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는 오늘은 수업을 못하겠다면서, 이 문제를 다 같이 논의해 보자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그렇게 끝났다.


왜 괴롭힘이 생겨나는지, 왜 그것이 나쁜 것인지 진심으로 설명하는 국어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사색에 잠겼다.


그 후로 나는 학교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이런저런 수군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꽤 외로운 법이었고, 그렇기에 더욱더 사색하고 생각한다.


눈물은 멈춘 지 오래전 일인 것 같았고, 동정 연민한 감정 따위는 사색이 깊어지면서 사라져 간다. 더욱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대놓고 내 욕을, 여자애들이 무리 지어서 수군거리고 웃고 나를 조롱하기에 그 아이들에게 직접 찾아가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보라며 하나하나 논리로 격파했고, 결국 울면서 나가게 하였다. 다른 주변 친구들을 데리고 와도 똑같이 격파했고, 그때마다 눈은 더욱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다만, 이런 나 자신이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친구를 옹호해 준 것을 후회하는 감정이 생겨난 것도, 그 후회라는 감정을 부끄럽게 여기는 나도 오묘하게 섞여가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니 처음 중간고사를 망치고 난 후 온 충격에 나는 기말고사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혼자 학교 도서관에 남아 11시 30분이 되면 집에 돌아갔다. 그렇게 열심히 애썼지만 생각보다 못 쳤고 어이가 없었다.


중간고사는 내가 못한 걸 알아서 충격이었지만, 기말고사는 공부했음에도 못 쳤다는 허망함은 꽤 컸다. 기말고사 때에는 왜 공부를 열심히 안 했느냐는 부모의 말에 나는 더욱 기가 찼다. 가방은 낡고 느슨해지며, 짊어질 책은 늘어 간다.


겨울에는 독서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배웠던 시를 암송하며 걷는다. 음악, 힘들수록 음악을 듣는 일이 많아졌다.


2학기에는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코로나 속 음악 수업에서 나는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듣기 시작했고 감동했다. 그래서 음악 선생님께 장문의 카톡과 함께 음악에 대한 진심을 남겼다.


그리고 날마다 듣기 시작했다. 주제 전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생각하면서 듣게 되고 다른 연주자를 찾게 되며 그간 위로로 삼았다. 연주도 했다.


그런 나에게, 왜 클래식 음악 들으면서 있는 척을 하냐든지, 아니면 내 연주가 TV 소리에 방해된다고 듣기 싫다고 피아노 소리를 확 줄여버린 부모를 생각하니 그냥 공부만 하게 될 뿐이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빈집이거나 학교 음악실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영어 선생님께서 영어로 쓴 내 철학 수필에 신기해하며 어머니 아버지가 어느 대학에 나오셨냐는 물음을 던지고는,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두 분 모두 고졸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러더니 당황해하시면서 자기 부모님도 고졸이라면서 괜찮다며 일단락하셨다. 그 “괜찮다”는 문장도 이해가 잘 안 갔지만, 뜸 들인 나도 이해가 안 됐다.


고3이 되고 아버지는 내가 고3인지도 모르는 눈치였고, 나는 단지 내가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시 원서에 대한 대화가, 이제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일들을 드러내면서 13살의 일을 용기 내서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은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기억도 못 한다는 것이었고, 어머니의 반응은 “왜 그거 있잖아” 하면서 아버지의 아무렇지 않은 기억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냐면서 나를 나무라고,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코웃음으로 치부하기에, 그런 나는 병신 같은 연기를 한 것뿐이었고, 나는 그냥 비극적 드라마 속의 주인공에 몰입한 것밖에 안 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서 더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버튼이 풀리고 나는 감정을 삭제해 버렸고,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듯이 철저하게 해체했다.


어머니부터 시작하여 신랄하게 까기 시작하며 반박을 시작하면 더 큰 반박으로 몰아치며 무너뜨렸다. 그러더니 말로는 안 되니 소리 지르고, 울고, 화내기 시작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하며 다음으로 넘어간다.


대화는 내가 주도하며 아버지를 상대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러이러한 점, 그리고 이러이러했던 것을 서운했다고, 10살 때 차에서 “엄마랑 너랑 동생이 있으면 엄마를 먼저 구할 거다”라는 그 말부터 시작하여, 나에게 얼마나 관심 없는지, 당신의 비아냥이 어땠는지 시작하게 되었다.


......................


고등학교 2학년, 아버지와 함께 도서관에 간 일이 있었다. 나는 내가 읽을 책들을 고르며, 아빠는 그냥 태워주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 아버지의 휴가를 조금 다른 것으로 보내면 어떨까 싶어, 이번에는 같이 도서관 안까지 데리고 와서는 책이라도 접하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고른 것은 불교 철학책이었고, 아버지는 기술 부문에서 한 책을 뽑아 살펴보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나는 책을 다 골랐지만 아버지가 책을 더 살피도록 기다렸다.


책장 하나하나 넘겨짚는 모습에 나는 되게 멋있어 보였고, 그런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나를 발견하고는 책을 황급하게 닫고서 “그만 가자” 하기에, 나는 “아니다, 괜찮다. 원하면 이 책도 빌리자”라고 말했지만 “이런 것 읽어서 뭐 하냐”는 핀잔에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그대로 나오게 되었다.

......................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는 말. 그것과 함께 나에게 바리스타나 될 건가,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면서 텔레비전만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모습. 눈치, 실망함이 느껴졌고, 다른 아이들은 고3이라며 홍삼을 챙겨 받는 모습에 나는 그런 것 하나 없었는지.


당신이 실수해 놓고 그거에 기분 상해 나한테 윽박지른 것. 그래서 내가 “아빠가 실수했는데 왜 화내느냐”라고 했다가 나의 뺨을 갈긴 것.


내가 성적이 오르든 말든, 밤늦게 들어오면 아무도 없는 집. 수고했다고 하는 사람 없이 죽어 있는 집. 떨어져 가는 주식에 바들바들 떨면서, 내가 얼마나 의지할 사람이 없는지. 스읍 하면서 마른 입술을 다시는 당신을.

그러한 당신의 모습에서 나는, 도서관의 해가 들어오며 책을 보던 순간 멋있던 그 찰나의 모습을, 앞으로의 휴가, 인생은 그런 멋진 삶을 살기를 토로하고 나서는, 그게 안 된다고, 그냥 살아가는 거라는 아버지의 작은 외침.


언젠가 내가 기타를 만지고 있을 때 찾아와 잠깐 손에 익은 그 연주를 멋쩍게 연주한 그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기타를 메며 연주하던 그 모습을 다시 꿈꿀 수는 없겠느냐는 부탁과 함께, 아버지는 일하기가 바쁘고 피곤하다는 외침.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다는 외침.


그것에 나는 분수가 무슨 상관인지, 꿈, 취향, 취미는 그것을 떠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외쳤다.


분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꿈, 취향, 취미가 남 눈치 보면서 즐겨내지 못하는 것, 그것 때문에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을 외쳤다. 그리고 설령 그게 내가 어머니 아버지 분수에 맞게 내 꿈, 취향, 취미를 잃게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나를 안아준다.


떨쳐내고는 집을 나왔다. 수술을 제대로 끝낸 듯 나는 이제 감정이 되돌아오기 시작했고, 남은 것은 정처 없이 떠도는 일.


하늘에 누가 나만의 달을 훔쳐갔는지 한탄하며 소리치고, 연락할 사람 아무도 없는 내 손에 주먹을 꽉 쥐고는, 나는 주어진 내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내가 나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정신과 함께, 여전히 눈물은 7년째 멈춰있고, 눈물 대신 힘든—나의 칼을 가는 일밖에 없었다.


집에 다시 돌아가면 다시 초기화가 되어 변화는 없었다. 그리고 남은 날도 똑같이, 그날 그 일은 그냥 단순한 촌극으로 끝나버렸다. 이제는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


수능을 마치고 본 노을은 아주 붉게 타고 있었고,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수능을 마치고 나온 확신, 그리고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다른 아이들의 부모가 마중 나온 것을 내 부모님같이 여기며 집에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8년 동안 매고 다닌 가방을 보게 되었다. 이 가방만큼 나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자 너무 놀라면서 집에 자랑이라며 아버지 공장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으며, 그 뒤로는 나에게 말도 자주 하며, 나에게 고맙다며 그간의 인정을 받았다.


차에 타고 가는 도중 말했다.


“아버지, 제가 만약 대학에 붙지 못했다면 그간 일한 것은 아까웠을까요?”


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한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만약 대학에 가지 못했다면 들었을 핀잔과 한숨, 대학 입학 후에 달라지는 대우에 나는 경멸하게 되었고, 빨리 차에서 나가고 싶었다.


돈을 벌면서 나는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갔더니 요즘은 이러이러하게 산다고 하니, 내가 스테이크 먹을 돈으로 가족 밥 사주는 것은 생각 안 했느냐는 어머니의 핀잔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며, 겨우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거냐며.


다음 주가 되자 내게 경제적 지원에 대해 통보를 하며, 나는 그러한 통보가 어이없어 다시 따져 되묻고, 고3의 당신들 일에 대해 토로하게 되자 어머니는 내가 호로새끼를 키웠다며 시발놈이라며 눈물을 또 흘리면서 “내가 너한테 얼마나 해줬는데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는 어머니의 가스라이팅에.


그간 똑같은 패턴으로 7년 동안 이루어진 것을 분석한 나는 이제 13살의 꼬마가 아니라서, 그런 호소는 나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고, 다시 한번 더 정확하고 정밀하게 타격시켰다.


해체시켰고, 무기력하게 했다. 여전히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고, “나는 너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뜨려 놓기에는, “어릴 때 많이 놀러 가지 않았냐”는 외침에 대체 기억도 안 나는 3살짜리의 여행에서 무슨 추억이 쌓였을지 어이가 없어서 그냥 집을 나오게 되었고, 아버지가 뒤따라 왔다.


아버지가 차에서 말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하는 선거 아르바이트에서 사람들이 내 칭찬을 한다고, 그래서 자식 잘 키우셨다고 칭찬을 할 때, 아버지는 “자기가 혼자 다 컸습니다.”라고 한다.


이제는 내가 말을 건넨다.


“아버지, 주식하셨을 때… 아니, 그냥 내가 어릴 때, 학생 때 저한테 관심이 있기는 했어요?”


나는 아버지의 입에서 ‘그렇다’라는 대답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에서는 “아니”라는 한마디가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그리고 솔직히 그때는 네 생각 안 했다. 그냥 우리 잘되기만 바빴지. 하지만 혼자 잘 커 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나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면서


“그러면 내 인생 방해나 하지 마세요. 신경도 쓰지 말고 그냥 그렇게 지내요.”


그러고는 차를 나왔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하게 감정 없이 해왔다. 그리고 그냥 괜찮은 척 살았다.


의지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의지할 사람 없이도 혼자 다 해낼 수 있다는 것. 학교 창업 발표를 200명 되는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발표하던 내 모습을, 글을 쓰고 당당하게 발표하는 내 모습을, 내가 발표만 하면, 내가 말만 하면 얼마든지 상황을 주도하고 간결하고 확실하게 이끌어가는지.


다만 그게 8년 동안 너무 힘에 부쳐서, 너무 오랜 시간이었고, 외로웠고, 더욱 분명한 것은 그 시간대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며 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라는 것. 내키지는 않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는 내 굳은 신념. 그리고 그게 맞다는 것.


다만 그 사실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고,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지내고 싶어지는 생각,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는 것 때문에 고가 도로 아래 깊은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그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입에는 짠내가 나며 바다 위 달은 너무나도 울멍울멍 일그러져 있었다.


연락할 사람은 없나 찾아보며 전화를 걸었지만 바쁘다는 한 친구. 그 속에서 난 바다의 깊이가 얼마일지, 차가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것, 그냥 내가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을 오랜 시간 해왔기에 이제는 힘에 부친다.


마지막 남은,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확인해 버린 것에 나는 갈 길을 잃었다. 하지만 다시 정제한다. 가다듬고 원래 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눈물은 체내 염분 낭비라는 것을 억지로 세워가며 그냥 재미있게, 즐기고, 집중하고 살다가, 공허한 감정 그 끝에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대학까지 태워다 주면서 밥은 먹었느냐고 한다. 나는 일 때문에 못 먹었다고 했다. 밥을 먹고 가도 괜찮겠냐는 말에 알겠다고 했다.


조용히 도로를 달리다 어느 시골로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는 내가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였다. 항상 걸어서 1시간마다 오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며 돌아올 때는 혼자 걸어왔다. 그리고 저녁밥으로 국밥 냄새를 맡으며 왔다. 오늘은 그 국밥이 먹고 싶네. 아들.”


그 국밥 한 그릇을 하면서 “우리 아들이랑은 밥을 언제 먹어 봤더라” 하는 것이었고, 나는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조용해지면서 앞으로는 자주 먹자는 말에, 나는 그냥 고기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노력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밥을 다 먹고 다시 조용히 차를 탔다.


학교에 가까워지는 터널에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는 그냥 눈을 감았고 혼자 사는 내 공간으로 어서 복귀하기를 소망했다.


지나가는 노을에 시원해지는 여름, 그 하늘, 공기에, 찾아 노는 가을바람이 스무 살이 끝나감을 예고한다.


무엇을 자극한 것인지, 너무나도 힘든 나 자신을 속여 왔는지, 왜 그렇게 강해지고 날카로워졌는지 생각하면서, 지금 잘 살고 있고 행복하게 지내는 나의 스무 살이 끝날까 봐 두려워서 옥상에 올라가, 그 바람으로, 눈물을 말려내는 일만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