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sv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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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 눈을 뽑아 버렸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그 손을 뽑아버렸다. 이러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이지 않기에 더 보려 하고, 가지려 하니 더 갈망하며 발버둥 쳤다. 흔하게들 그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 과연. 그것이 마음의 문제인 것인가. 내가 지난 시간 동안 내려놓고 포기했던 것들은 정말 내가 눈과 손을 뽑았기 때문이었을까?
자려고 등을 지구에 기대었을 때, 나는 머릿속만큼 바쁘게 움직이는 별을 느끼고, 그렇게 나는 떨어진 체온을 채우기 위해 베개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렇게 또 잠을 이룬다. 밤은 내게 지독한 순간이었으며, 고독은 나의 영혼을 부셨다. 지독한 애정결핍과 해방감의 욕구는 나를 미치게 한다. 끊임없는 밤에서, 나는 그렇게 힘을 뺀 뒤에야 잠에 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마음은 죄가 없다. 마음만큼은 솔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려놓기를 배우는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머리로서 참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내려놓기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르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망설이지 않는다. 고독과 고립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며, 우리를 더욱 욕망하게 만든다. 이성이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욕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더 깊은 것이다. 그렇기에, 내 글에서 욕망이라는 단어는 나를 뒷걸음치게 만든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인간의 행동 양상을 순전한 욕망하기 뿐인, 괴물로 보는 내 추후를 경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예술 또한 욕망하기", "부수적으로 우리를 채우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전부 우리의 욕망하기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아주 가증스러운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더 잘 알게 된다는 이성적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통제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확신은, 스스로를 더 고양된 존재로 믿게 만드는 교묘한 자가 포획이다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보고 싶으면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고, 듣고 싶으면 들어야 하는 것이며, 가지고 싶으면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실 즉, "우리가 원하는 것과 현실은 그렇게 친밀하지 않은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와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부富와 명예와 같은 "가질 수 없는 어떠한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닌 머리로 말하는 것이다. 마음은 바로, "나"로서 행동하게 만들며, "나"로서 보고, 듣고, 느끼는 체험 속에 위치하게 되는 것, 마음은 그것보다 더 바라는 게 없다. 마음의 눈은 언제나 가까운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먼 것을 욕망하는 건, 언제나 머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발짝 더 내려놓게 된다.
하지만 달콤한 이성은 마음에게 속삭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모르는 상태로 있기, 발버둥을 멈추기는 결국 정신과 존재를 휘갈겨 찢어버렸다. 그렇게 박제된 동물의 사체처럼 "나"는 남아서 그 자리를 장식했다. 어쩌면 나 자신만은 영원하지 않더라도, 이 풍경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내의 마음은 빼앗겨 버린 것이다. 가만히 박제당하면, 그것만은 오직 영원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 나는 모른 채로 살 수 없다. 나는 지켜보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이성의 목소리인가, 나의 마음의 목소리인가. 그것들 중 어느 것이 나를 설득시키고 움직이게 하는가! "동물적 욕망하기의 분석 결과"가 나를 설득하는 건가, 아니면 참을 수 없게끔 채워지고 있는 고요한 웅덩이 인가!
나는 그렇게 위에서 관조하는 전형적인 무대 위 객석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들은 연출된 그 욕망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같은 감정을 강요하게끔 만드는 그 구조적 폭력과 연출의 아이러니함을 보라. 지적 착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박제되어 있다. 예술은 욕망의 발현이라며, 그저 객석에 앉아 타인의 몸부림을 구경하는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관하는 것뿐.
이제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 구조에서, 그 폭력에서 벗어나려, "나"는 몸부림친다. 몸부림이 춤이라면, 나는 팔과 눈도 없는 객석을 무대로 전환하고자 한다. 나는 눈을 잃었기에, 이곳이 무대요, 나는 팔 없이, 존재의 손길을 느끼려는 가여운 사내이다. 그렇게 나는 죽음이요, 나는 괴물이다. “그”는... 영원함과 춤추며, 몸부림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항상 dusvlf이기 때문에. 그는 항상 내 곁에 있으며, 그는 언제나 나의 기억 속에 있다. 그는 내가 기획하며 투사한 거대한 존재이며, 그는 그렇기에 살아있다. 그렇게 “그”는 죽음과 같이, 찢어져가는 발버둥 속에서, 손을 더듬어서 붙여매고, 마침내 눈을 끼워 넣었다. 이제, “나”는 보고 느낀다. 이것은 내게 일상의 체험과 그 소중함을 고립 속에서 보내지 않으려는 마지막이자, 어쩌면 반복되는 처절한 사투이다.
마음은 스스로를 속인다. 이성은 마음에게 속삭이며, 마음은 부끄러워 감추게 된다. 하지만 결국 마음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든다. 적어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추론 속에서도 영원한 의미를 생성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결국 이성의 속삭임에서, 용기를 내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마음은 언제나 영원한 바다를 꿈꾼다. 비록 언젠가는 다 말라버릴 저 바닷물이지만, 결국 우리가 눈을 달며 보게 되는 것은 끝없는 바다 아닌가. 비록 모래사장의 모래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모래 한주먹을 쥐고 흘러내리면서, 이 모래는 영원히, 무한히 많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우리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 아닌가. 나는 그렇게 영원히 변하는 파도를 보며, 영원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모래는 해질 때 날아올라 어느새 하늘에 별로 장식됨과 동시에 말이다. 나는 영원하지 않지만, 이 풍경은 영원하게 바뀌고, 영원하게 남아있을 테니!
내 마음은 요동치고,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기대하며, 무한한 시간 가슴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누었던 체온이 이성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여전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 바다는 태양이 뜨고서 다 증발해버리지는 않을까. 무한한 수의 모래들이, 흘러 흘러 소멸하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 의구심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으로, 마음에게, 속삭이며, 주문을 건다. … "아, 나의 사랑. 언제쯤 돌아오는가요.", "아, 나의 조국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요.", "작디작은 나의 어린 추억들은, 다시 돌아와도 그 자리에 있을까요?" … 젠장, 나는 그곳을 꿈꾸며, 후회하고 슬퍼하는 걸까. 그 사내는 작은 손으로 모래만을 움켜잡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해가 내려가면 자연히 위를..."
"그렇기에 나는 움켜진 것을 내리고..."
그런 나는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때론 분노하며, 흐느끼며, 애써 웃음을 지어 모래 주먹을 푸는 한 사내를 말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바다를 보고는, 손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와 같이, 눈물로 소멸하게 될 바다를 다시금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한 나 자신 말이다. 그렇게 마음의 눈은 내게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게 했다. 단호한 결심의 손에서, 영원한 바다를 다시 채우게 만들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마음이 가장 원했던 것은 거창한 부(富)도 아니며, 지난 인연을 품에 넣는 것도 아닌, 다만, 그리고, 오직, 슬픔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