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회사 사옥을 이전하면서
고정좌석제가 아닌 자율좌석제 시스템으로 변경되어 모든 직원은
매일 아침 원하는 자리를 예약해서 원하는 좌석에 앉아 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 시스템에서는 같은 팀이지만 말 그대로 자율좌석제이기에 본인의 의지에 따라
팀에서 멀리 자리를 잡으면 온종일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처음 시도했을 땐 같은 팀끼리 비슷한 구역에 앉아 서로 얼굴을 보며 소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점점 멀어져 선호하는 좌석, 편한 사람들 근처에 앉는 게 암묵적 합의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팀은 팀장과 나를 포함한 직책 자(파트장) 3명이 모여 앉고,
나머지 7명은 저 멀리 떨어져 그들끼리 재미나게 지낸다.
이해는 간다. 팀장이나 직책 자들 근처에 앉으면 나이 차이가 꽤 나니 편하진 않을 테고,
아무래도 얼굴 보이는 사람들한테 더 많이 물어보고,
일을 시키게 되니 업무상 떨어지는 일도 많아 좋지만은 않으니 말이다.
또한, 근처에 앉으면 구내식당에 갈 때 자연스럽게 점심도 같이 먹으러 내려가야 할 텐데
점심시간까지 업무 이야기 혹은 서로 알고 싶지도 않은 사생활 이야기하며
소중한 쉬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업무는 자연스레 메신저로만 하게 되고
메신저도 바로바로 답변이 되지 않을 땐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전화를 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내 자리로 오거나, 내가 후배들 자리로 찾아가는 때도 있다.
답답하고 불편했지만, 후배들은 편하겠거니 생각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그렇게 지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 편의 봐주다간 얼굴을 마주 보며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없으니,
업무도 제대로 안 되고 무엇보다 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고
많은 것들을 바꾸기 위해 실행하고 있다.
우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다 같이 모여 메신저가 아닌 얼굴을 마주하며 회의를 진행한다.
월요일 즈음 서로 중요한 업무와 일정을 점검하며,
근황을 공유하고 서로가 한 팀임을 눈과 행동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우리 파트만의 고유한 업무지침을 만들었다.
‘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후배들 눈치를 보지 말고 소신 있게 행동하자고 마음먹었다.
리더십, 팀워크 관련해 여러 강의, 책 등을 두루 섭렵하여 나와 후배들이 잘 지킬 수 있는
우리 파트만의 고유한 업무지침을 만들고선 후배들에게 4가지 지침을 공유하였다.
그 네 가지 지침은 다음과 같다.
1. 협동
2. 기본과 원칙
– 업무는 규정과 지침에 따라 기본과 원칙을 따를 것
3. 보고서는 간결하되 숫자는 꼼꼼하게
- 재무 쪽 업무라 보고서는 간결하되 숫자는 꼼꼼함이 필수이다.
4. 배움과 성장
- 회사 업무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조력자가 되어준다.
지침 내용을 보면 사소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공통된 규칙으로 정함으로써
업무와 회사생활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같은 파트에서 일하는 후배는 총 4명인데
가장 적게는 8살, 가장 많게는 16살까지 나이차가 나는 후배들과 일하니
세대차이를 느끼게 되었고, 이에 이런 명시적인 지침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견해차이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지침을 듣고, 가장 먼저 주니어 사원이 하는 말은
“협동이 뭐예요?”였다.
'이 친구는 협동이라는 단어를 모른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묻는가 싶어 재차 확인하니 어떤 걸 협동하냐는 뜻이었다.
협동에 대해 질문하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Z세대들과 세대 차이가 나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협동이 뭐냐고 묻는 사원의 눈을 보곤, 순간 벽이 느껴져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협동이라는 단어에 대해 인지할 기회가 없었나 싶기도 하였고,
내가 애매한 단어를 썼나 싶어 몇 가지 예시를 들어줬다.
“다른 사람이 휴가 갔을 때 백업 담당을 만들어 업무에 차질 없도록 하는 것”
“각자 능력과 역할에 따라 업무를 분담하겠지만
다른 팀원이 업무나 회사 일로 힘들어할 때 서로 도와주는 자세”라고
후배들은 갑자기 내가 왜 이러나 싶었겠지만
실은 오랜 기간 생각해 오던 걸 실천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 정신과 의사인 양재웅 씨가 TV에서 건강한 멘탈 관리법을 추천해 준 영상을 보았는데,
그중 하나는 눈치 보지 말고 배려하라는 것이었다.
* 눈치와 배려의 차이점은?
눈치는 남들이 나를 싫어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고,
배려는 내가 해줄 수 있다는 감정이 밑바탕에 깔린 것으로
자기 주도적인 선택과 결정이 없느냐 있느냐의 차이이다.
내가 눈치 본다고 느껴지면 삶에 결정권이 없기에 인생이 억울해진다.
하지만 배려에는 선택, 결정권이 있기에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간 좋은 사람, 좋은 선배인 이미지를 주고 싶은 마음에 후배들을 배려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실은 눈치 보며 행동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고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연예인도 아니고 회사 선배로서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건 사치다.
눈치를 보든 말든 어차피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게 되어있다.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맞추는 건 이제 하고 싶지 않다.
난 내 자리에서 내 역할에 따라 주도적으로 내 할 일을 다 할 것이고,
나와 뜻을 같이하는 고마운 후배에겐 눈치가 아닌 배려로 대할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 쇼펜하우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