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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동아빠 구재학 Feb 06. 2024

아내에게 그림을 선물한 이유

첫 결혼기념일의 살 떨리는 추억

방송에서 웹툰작가로 유명한 방송인이 그림을 그린다.

나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문득, 이십 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신혼 초였다.

구름이 낀 주말 오후, 아내는 외출하고 나는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알싸한 기분이 든다.

뭘까? 이 느낌?

달력을 봤다.

결혼기념일. 결혼 후 맞는 첫 결혼기념일이었다.

온갖 기념일을 꼬박꼬박 잘 챙겨 온 내가 미쳤나 보다.


오후 세시. 아내는 일곱 시에 돌아올 것이다.

저녁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내 머릿속은 선물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에 자책을 하며 회로를 빠르게 굴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인데, 꽃다발은 너무 식상하다. 그런데, 집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는다. 주말 오후에 백화점은 답이 안 나온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문득, 고교시절에 그림을 그렸던 생각이 났다.

교회 여학생들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은데 기타는 못 치고, 그림 잘 그리는 오빠로 보이고 싶어 그림연습을 했었다.


다행히 신혼집이 대학교 근처여서 화방이 있을 것 같았다. 서둘러 학교 앞으로 갔다. 주말이라 가게문을 닫은 곳이 많았지만, 천만다행으로 화방은 아니지만 종이와 연필, 그리고 작은 액자를 살 수 있는 가게를 찾았다.


집에 돌아오니 네시. 이제 세 시간 남았다.

너무 오랜만인데 잘할 수 있을까?


앨범을 꺼내서 사진을 골라봤다. 그림으로 그릴 마땅한 사진이 없다. 결혼앨범을 꺼냈다. 스튜디오 사진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내의 독사진. 그래, 이걸로 하자!


난 인물을 그릴 때 눈, 코, 입 순으로 그리는데, 다행히 눈과 코가 잘 그려졌다. 다음은 입인데..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눈, 코보다 입이 더 어렵다. 자연스러운 미소가 입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눈과 코까지는 너무 예뻤는데, 입이 망쳐졌다.

지우고 다시 그렸다. 정성을 다해서..

그런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 반이 흘렀다. 머리와 목과 어깨도 그려야 하는데.. 마음이 바빠졌다. 입을 여러 번 지우다 보니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제 한 시간 남았다.

마무리를 해야 한다. 머리를 그리고 목과 어깨를 그렸다.

입만 잘 마무리하면 되는데.. 살짝살짝 지워가며 계속 수정을 했다.


어느덧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되어간다.

명암을 더하고, 마무리를 서둘러했다. 여전히 입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액자에 넣고 보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드디어 일곱 시. 아내의 발걸음 소리.

문이 열린다. 그녀가 들어오고.. 첫눈에 거실 테이블에 못 보던 액자를 알아본다.


내 결혼기념일 선물을 본 그녀는 기뻐했고,

난 오후 내내 분주했던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그 후로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서 초등학생이 된 어느 날,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 선물을 준비하며 첫 번째 기념일 얘기가 나왔고, 난 그때 그 선물에 대한 아내의 속마음을 처음 들었다.

난 그 그림이 너무 싫었어. 입은 툭 튀어나와 가지고..




아내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대번에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 급하게 그린 거라는 걸 알아봤다고 한다. 그래도 노력이 가상해서 받아줬는데, 내가 그 그림에 너무 자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차마 치우자는 말을 못 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이유가 이거였었다.  OTL




<80년대 연습장 소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에 연습장 앞면을 도배한 어느 이름 모를 소녀. 당시엔 백혈병에 걸린 일본 소녀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도 그 시절에 이 그림을 보면서 그림 연습을 했었고, 눈이 예쁜 아내에게 그려주고 싶었던 그림이 이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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