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만나고 싶은 날...
첫 눈
- 김 중 근
이른 아침 부터 하얀 길을 아무도 밟고 가게 할 수 없어 마음은 먼저 첫 눈길을 달려간다.
무작정 누군가와 함께 첫 눈 길을 밟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펑펑 내린 눈빛은 참으로 환하다. 각별히 환한 느낌은 아마도 하얀 눈이 마음 깊은 곳까지 쌓여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공 중에 사라진 하늘의 깊이가 펄펄 내리는 눈송이에 완전히 묻혀서 않보인다. 살포시 내린 하얀 세상은 환상의 세계로 손짓한다. 송이송이 날리는 눈송이는 온 마음을 뺏았고, 어린 아이들처럼 환호하게 만든다. 발코니 멀리에서 조심히 걷는 선남선녀의 모습들이 보인다. 필시 순백의 사랑 꽃들이 그들 가슴에 송이송이 맺혀있을 것이다. 밖으로 환하게 펼쳐진 풍경에 이르니 어두웠던 마음 한 순간에 밝아지고 수정같이 밝은 햇빛이 눈부시다. 결좋은 햇살 사이로 하얗게 살아난 별천지는 산이 숨고, 곁에 있는 대나무 숲도 숨고, 개울 따라 흘러가는 바람 소리, 구름마저 하얗게 숨었다. 눈은 제 무게에 놀라 툭툭 떨어져 내린다. 진한 솔향이 배어있는 눈 꽃들이 하얗게 잠들었던 영혼까지 흔들어 깨운다. 눈 덮인 풍경은 자욱자욱 밟히는 소리마다, 도시의 권태를 하얗게 털어낸다. 온 몸의 실핏줄 틈 새 마다 터져 나오는 환희의 떨림은 온 산을 흔들고 우주를 깨운다. 골짝 골짝 흰 자락에 퍼지는 환희와 신비감은 입 마춤의 떨림처럼 짜릿한 상큼함을 준다. 솔향이 그윽한 하얀 솔가지엔 파아란 희망이 솟고, 천 길 낭떠러지에 삶이 솟는다.
첫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날은 무작정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날이 된다. 아무도 가지 않은 첫눈 길의 첫발자욱은 어느 누구일지라도 늘 신선한 설레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로 연인들 사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사랑의 증표로 손을 잡고 걷게된다. 함께 말없이 걷다 카페 언덕 길에서 넘어지는 모습조차 예쁘게 보인다. 걷다가 붕어빵 파는 포장 마차를 만나게 되면, 둘은 포장 마차의 호롱 등불에 밝힌 눈 내린 거리를 걷고 또 걷게된다. 붕어 빵을 호호 불어대며 서로 먹여주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첫 눈이 아니고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때문에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했던 첫눈이 내린 밤 거리는 이보다 더한 멋진 세상은 없다. 인기척에 대청 마루에서 내려와 기다린듯 반갑게 맞이하는 고운 손님처럼, 첫눈은 설레임과 기쁨이 숨어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연인들 두 사람 사이를 아름답게 이어주는 설레임의 정도야말로, 첫눈이 아니고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별로없기 때문이다
연인은 아닐지언정, 눈에 파묻힐 정도의 이런 별천지에 솜사탕 보다 부드러운 맛을 지닌 사람을 나는 오늘 만나야겠다. 오늘, 나를 위해 완전한 하루를 비우겠다. 전화 한 통으로 무작정 달려 나올 수 있는 사람을..., 미륵산 가는길 빨간 황토방 선술집이 좋겠지....,흘러나오는 호롱 불 빛을 달빛 삼아, 텁텁한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켜놓고 마음 속 찌꺼기를 날려줄 그런 사람을 불러야겠다. 막걸리 한 잔에 파전과 북어포 놓고, 언잖았던 인간들을 씹어야겠다. 술이 잘 익은 황토 주점에서 그래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정태춘의 촛불을 조용히 들으면서 말이다. 희미한 호롱불을 가운데 두고 오랜 시간 동안 푸념을 들어줄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에, 오늘같이 첫눈 오는 날이 제격이다. 첫눈 같이 세상 사는 맛을 느끼게 할 것이다. 막걸리 한 대접으로 모든 걸 훌훌 털어 낼 수 있는 통이 큰 사람을 만남으로써 마음의 치유가 되서 좋다. 그는 고통과 실의 속에 방황하고 한때 절망했던 사람이다. 그와 만나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첫눈 오는 날에 나에게 주는 큰 선물이 된다.
숨 죽여 졸졸거리던 돌 틈의 물방울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사람, 눈송이처럼 송이송이 하얗게 적어 보낼 그런 사람이 가슴에 자리하고 있다면, 티없이 맑은 첫눈 밭 위에 내 마음의 진정을 새겨놓겠다....
-2024년 11월 27일
첫눈이 오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