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품속은....
조용한 밤
- 김 중 근
밤이 날개를 펼칠 시간, 소음이 하나 둘 꺼지고, 고요가 천천히 내려앉는다. 바람은 이파리의 숨결을 살짝 건드릴 뿐, 그조차 이내 멎는다. 바람도, 발자국도, 세상의 모든 소리도 모두 눈에 묻혀 사라진 이 밤이다. 시간마저 태엽을 멈추게 한다. 밤 하늘은 흰 눈 송이로 편지를 셀 수 없을 만큼 써서 땅 위에 고요히 내린다.
밤 사이, 세상은 고요히 변했다. 문풍지 사이로 스며드는 어슴푸레한 달빛조차 눈송이의 숨결을 스칠까 싶어, 살며시 발 끝을 들고 지나간다. 진종일 회색 호흡을 내쉬었던 마을 어귀는 이제 흰 숨결로 조용하다. 금강의 숨결도 사라진 이 시간이다. 눈은 말없이 내려와 지붕 위의 기억을 덮고, 가지 끝의 그리움을 감싼다. 세상 한파(寒波)에 시달려 울퉁불퉁했던 마음을 폭신하고도 하얀 부드러움으로 다독여 준다. 밤은 홍조를 띤 소녀의 마음처럼 그리움과 독백 속에서 잃어버란 시간을 쫒아 달린다. 창문 너머 달빛이 조용히, 홀로 있는 방 안으로 스며든다. 그 빛은 말이 없지만, 오래된 위로처럼 마음 한 켠을 어루만진다. 하루종일 내린 눈송이의 흩어졌던 생각들이 쌓인다. 차분히 내려와,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 사각사각 밟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밟히는 눈길이 제대로라면, 내 마음 주위를 서성이던 사람들의 이름들을 밤새 내린 눈위에쓰고 싶은 충동이 드는 밤이다. 한편 내 심장에 대 못을 쾅쾅 박았던 사람들, 소스라치게 놀랄 사람들까지도 오늘같이 흰 눈 내린 날에는 미워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앞설듯 싶다. 사라진 기억은 그리움 타고, 눈물로 적셔진 나뭇가지는 하얀 침묵에서 깨어난다. 그 시선 속엔 외로움보다 평화가, 쓸쓸함보다 맑은 침묵이 흐른다. 후드득 바람결에 기억이 떨어진다.
한편 눈송이를 뿌리치지 못한 가지 위에 이름모를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눈빛 젖은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지 못한채 잠을 청한다. 잠이 안온다. 좀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고요한 시간이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빈 가슴에 사라진 기억을 소환하여 채우는 시간이다. 별들도 소리없이 반짝인다. 기억은 별빛 타고 그리움이 된다. 흰 눈이 사방을 감싸줄 때 그리움을 쫒고 기억을 쫒아,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조용한 밤은 나 자신의 울림과 교감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고요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찾는다. 지나친 욕망을 잠재우고, 흩어진 마음을 가만히 모아줌으로써,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시간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시간이 된다. 종전과 다른 오묘한 느낌은 밤의 적막만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눈부신 고요는 사라질 테지만 그 속에 남은 평화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아마 따스한 봄이 와도 내 마음에 남아있는 흰 눈은 녹지 않겠지....
조용한 밤 하늘의 눈송이처럼 다가온 침묵의 품속은 내게 인생의 거친 행로를 뚜벅 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때문에 세상의 소리가 아닌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므로 나는 조용한 밤을 사랑한다.
2024년 12월, 흰 눈이 내린 조용한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