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377
건강보험관리공단과 대한탈모치료학회에 따르면 추정 탈모인구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달하는 약 천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발착용 인구수를 알고 싶었지만 항암환자나 패션 목적 등 다양한 수요층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탈모와 가발을 연관 지어 가발 전문점의 수를 확인해 보니 공장과 소매상을 포함해 1,500여 곳에 달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느라 손이 바삐 움직였다. 헝클어진 머리 틈새로 고정핀과 망이 타인의 눈에 띌까 만지고 또 만졌다. 카메라로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였다.
자주 안 써서 어색한 거라고 가발집 사장님은 늘 말씀하셨다.
자주 써야죠!
불편하니 안 쓰게 돼요.
어색하니 안 쓰게 되고 안 쓰니 더 불편하고...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에 갇힌 듯 탈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깨끗이 포기할 수도 없는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여기에 더해 안 어울려!라는 주변에서 툭 던지는 말도 나를 한층 주저하게 만들었다.
가발 쓴 연예인을 TV에서 보면서 자랐지만 정작 내 인생에 가발이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항암을 시작하며 암환자의 필수품으로 민머리 위에 턱 하니 걸쳐 쓰고 외출했다. 단발 가발이었다. 여태 본 어떤 헤어스타일보다 잘 어울린다는 시누이의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어색함을 버리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고, 모자로 충분히 커버가 될 때쯤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고이고이 싸서 버렸다. 울산을 떠나기 전에.
경기도로 돌아와 학부모 총회를 앞두고 인생 두 번째 가발을 구입했다. 정수리가발을 쓰고 학교에 몇 번 갔다. 그러나 결혼식이든, 학교 모임이든, 어디든지 가발 대신 모자를 썼다. 대신 가발은 화장대 밑에서 먼지를 조용히 뒤집어썼다. 슬프게도 항암 종료 후 5년이 넘도록 머리숱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는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걱정 없이 사는 것 같은데 그런 행운이 나에겐 없었다. 엄청난 파괴력으로 몰살된 모발세포는 원상 복귀되지 못해 탈모인처럼 정수리는 휑한 상태로 남았다. 본격적인 탈모치료를 미루면서 가끔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이 풍성해 보인다고 식구들을 불러 얘기하면 변화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올해부터는 자주 쓰고 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자가 익숙하나 언제까지 모자 속에 숨고 싶지 않았다.
가발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으면 좋을 텐데.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자연스러움을 찾는다는 모순을 극복하고 싶은 게 큰 욕심일까. 그게 안 되면, 가발이니 가발로 쓰면 되는데 그것도 생각만큼 안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심리탓인지 타인의 가발은 자연스럽게 보이던데 내 가발의 문제는 뭘까 싶었다. 고가의 맞춤형이 아니라서? 잠깐 스친 그 생각에 붙잡혀 검색을 통해 얻은 정보를 가지고 무턱대고 맞춤가발 판매점으로 갔지만 예약제라 말조차 붙일 수 없었고, 최저가격을 듣고 돌아섰다. 쓰던 가발을 정리해서 써보겠다는 생각으로 자주 가는 가발집에 갔다. 그리고 난 세 번째 가발을 샀다. 이전 것보다 자연스러워 보였기에 충동구매인 듯 아닌 듯 헷갈리는 가운데 사버렸다. 약간 미안한 얼굴을 한 사장님은 새 가발을 들고 몇 초 고민하시다가 조금 싸게 해 주셨다. 진작 이 가발을 보여줬더라면 자주 썼을까? 가발 사장님에게 집에서 가져온 가발을 넘기며 중고로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안 쓴 새 제품 같아도 연식이 있으니 팔린다 해도 기껏해야 5만 원을 받을 거라 했다. 사장님 손에 맡긴 채, 이상하게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새 가발을 쓴 채 집으로 와서 다시 화장대 앞에 섰다.
그래, 이제는 쓰고 다니자!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몇 번씩 정수리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아무도 관심 없는 내 헤어스타일에 혼자 소심하게 끙끙대지 말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쓰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적응해 착용감이 향상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세상속으로 나갈 그 때를 기대하며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모자를 벗고 집 밖으로 나갔다. 갑갑했던 시야가 트이고 머리는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