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오만하지 않음
[오만과 편견] 플롯을 따르면 엘리자베스의 감정선에 이입할 수밖에 없다. 편협한 자기 방어의 완전체. 경멸에 가까운 눈빛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다아시의 오만함에 난색을 감출 수 없기에 나조차 베넷가의 측근이 되어 그녀의 편견을 정당화했다.
사실 그래도 된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가진 오만함은 외부로 표출되기 때문에 갈등 고조 장치의 역할로 인지되는 구조니까.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걸 극복하는 데에서 오고, 그제야 진실된 마음에 가까워질 수 있다, 뭐 그런 내용일 테니까. 어찌 됐든 너희 둘이 잘 되겠지. 클리셰적 구조를 믿고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해
본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의 세계가 확장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해 봤다. 며칠 전 시청한 나는 솔로 30기 영숙과 영호의 대화가 떠오른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절망 편이 그들인가? 갈등 해소의 카타르시스는 찾을 수 없고 오만으로 점철된 대화였는데.
그렇게 몇 정거장 더 지났는지 모른다. '진정한 사랑'의 발제문과도 같은 닫힌 결말이 뻔하게 아름다워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연애 말고 사랑해야겠다. 울면서 달려가 안기는 거 나도 해 봐야겠다. 그런 사랑 누리는 이들의 기본 소양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아, 잠만. 엘리자베스랑 다아시는 원래도 진국으로 정평 나 있지 않았나?
그들의 오만함으로 성찰하는 것이 적합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대다수는 높은 확률로 위컴이 가진 오만함의 양상을 띨 텐데.
위컴은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해 다아시와의 에피소드를 왜곡하여 전달한다. 사건을 함구하는 다아시로 인해 엘리자베스의 오해는 더욱 깊어져가고 진실을 보는 두 눈을 가린다. 하여, 위컴은 자신의 오만을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한다. 아니, 못한다. 남의 일에는 그렇게 간섭하고, 개입하고, 정당화하고, 관철시킨다. 그러면서 역지사지를 버거워한다. 전할 땐 쉬운데 수습을 못한다. 인정하는 사람은 '아님 말고' 따위의 안일한 말을 뱉지 않는다.
그 관점에서 위컴은 안일함의 산물이다. 그의 오만함조차 두 사람이 편견을 맞섬으로써 해소해 주었기 때문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다아시의 선입견을 만든 사람이면서 그 선입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편리한 해석으로 회피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취하고, 오만의 정점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다아시처럼 경멸하는 눈빛을 드러내는 사람보다, 그 눈빛이 자신에게 오는 걸 알면서도 그 눈빛이 자신의 것인 줄 모르는, 그 무식함이 가장 경멸스러운 거라고. 자신조차 속여버리는 추악함이 다아시의 금전을, 베넷의 막냇동생을 갈취시킨다. 도둑놈의 새끼. 창피한 줄 모르는 위컴이야말로 현세에 만연한 오만의 군상이다.
인간은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할 때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스스로를 변호하려 애쓰는 것도 백해무익하며, 그 화살이 남에게 향하는 순간 집비둘기처럼 되돌아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다 똑같은 사람이 한 말인데 갑자기 생각난다.
어쩐지, 위컴 등장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부대가 복귀하는 길에 위컴이 나자빠져 죽거나 미스터 베넷이 모가지를 댕강 자르길 바랐는데 그러지 않아서 아쉬웠다. 역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란 말에 절대 반기 들 수가 없고.
반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맑은 샘물처럼 투명하니 제목을 바꿔야 한다. [극악무도 회피형은 죽을 때 유서로 고백한다] 이런 거. 폐 끼치기 싫어하는 답답이들의 소통 부재 정도에 가져다 붙이기엔 과분한 제목 같다. 걔네는 서로 그럴만했는데 위컴 새끼의 오만함에 비하면 손톱의 티끌만큼도 못 미치지 않나.
몰라, 아무튼. 위컴 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