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해냄 청년이 돼
26년의 365일 중 55일이 소진됐다. 나 몰래 온 것도 아니고, 허락 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만, 새삼스레 재빨라서 또 조급하다. 케이크 위에 꽂힌 하트 모양 초 같다. 그렇게 짧뚱하고 귀엽게 생긴 초들이 꼭 유난스럽게 철철 녹아버리니까. 그나마 초는 후 불어 붙잡아 둘 수라도 있지 이거는 정말 속절없다.
연말에 친구들과 모여 ‘26년 버킷리스트 빙고’를 적었다. 3x3 아홉 칸에 적힌 버킷리스트를 가장 많이 이루는 사람에게 얼마씩 주기로 했다. 누구 하나 빼지 않고, 다섯 명이 펜 두 개를 사이좋게 돌려 써 가며 채워나갔다. 째는 소리 한번 낼 법한데 아무도 그러질 않아서 진중히 임하는 모습 자체로 동기부여가 됐다.
새해 목표란 건 형식적으로 매년 세워왔으나, 그간에도 이토록 구체적이고 정량화된 것은 없었다.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그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펜을 서른 번 넘게 돌렸다.
새 운동 시작하기, 자격증 따기 같은 발전적 목표가 변경 불가 옵션이라면, 책 n권 이상 읽기를 목표로 한 친구들에게 영감을 얻어 감히 창작자로서의 목표를 세웠다. 브런치 12편 이상 쓰기, 책 한 권 더 내기. 버겁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한(한번 해 봤다고 자아가 너무 커진듯) 수준으로. n권에 내 책이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공급자 마인드로다가.
그러면, 26년을 15% 정도 소진한 시점에서 회고해 보자.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하고 싶은 운동을 찾았다. 방학 내내 미뤄둔 일기처럼 몰아 쓸 자신이 없어 부랴부랴 글 한 편도 써 본다.
라는 말을 하기까지 변수가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인생 뜻대로 안 되는 건 애진작에 알았다만 이렇게까지 수틀릴 필요가 있나 싶다. 불운이 몇 콤보인지 가늠도 안 간다. 완료 시 경험치 몇 배 더 주려고 이러는 건지.
하여, 1분기 목표는 ‘2분기 실행안 수립’과 ‘3n년에 대한 회고’로 설정했다. 그 내용으로 시리즈 연재라도 해 봐야지. 얼마나 솔직해야 할지 엄두 안 나도, 글감이 넘쳐나는 시기라면 뱉은 말 지키기 최적이니까. 직업병 도져서 시리즈 네이밍만 수백 개 해 뒀다. 입은 여전히 안 떨어지지만.
사실 핑계고. 뭐라도 적어야, 기록해야, 정리해야 남은 85%의 누수를 최소화할 수 있을 듯하다. 외압에 밀리지 않으려면 내가 단단해야 하는데 코어 운동 쌩까고 살아온 셈이다. 메타인지 나발을 강화하려면 패착 원인을 스스로 파헤쳐야 하는데 그거 정말 꽤 어렵다. 자만하기 마뜩잖음에도 노력하기보다 올려치기가 쉬워 꽤 오랜 시간을 그리 보내왔다.
뭐,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놈의 회고 소리 몇 달 며칠 읊조렸더니 이골이 났다. 덕분에 이제라도 중요성을 깨닫고 용기 내어 뒤돌아 보려고 한다. 진짜 인생 존망(存亡) 갈리는 중대 시기에 말이야. 그래도 하나 대견한 점은 남 탓 안 한다는 거다. 나 잘한 거 없으니까.
어, 이것도 회고의 부재로 좀먹는 건가.
차치하고, 26년이 벌써 85%밖에 안 남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