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09)
* 노란 동백꽃 *
학창 시절 배운 적 있는 김유정의 [동백꽃]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성에 눈뜬 ‘점순이’와 아예 모르는 숙맥인 ‘나’는 같은 또래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점순이의 의도를 모른다. 그러다가 점순네 수탉을 내가 죽여버리는 사건이 벌어져 절망에 빠져 울 때 점순이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쩍 나를 감싸준다.
다음은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이 '노란 동백꽃' 때문에 예전엔 말이 많았다. 고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동백꽃은 빨갛는데 왜 작가는 노랗다고 했습니까?”라 질문했다가 괜히 선생님께 혼이 났다. 다행히 아주 점잖은 분이시라 딱밤 한 대 맞고 끝났지만.
교사가 되어 나도 한동안 그렇게 가르쳤다. 노란 동백꽃도 있다고. “코스모스를 봐라. 빨강, 노랑, 하양 다 섞여 있지 않느냐.” 하고 우기며. 다행히 그때는 나처럼 되바라진 애가 없어선지 물고 늘어지지 않아 딱밤 먹일 일도 화를 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80년대 중반이 돼 자습서에 드디어 노란 동백꽃이 우리가 아는 동백꽃이 아니라 강원도에 피는 ‘생강나무꽃’을 가리킨다고 올랐다. 작가 김유정의 고향이 마침 강원도 춘천이고 거기선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이라 한다니, 소설 속 동백꽃과 생강나무꽃이 같다고 정의되었다.
늦겨울의 추위가 매섭다가 기온이 올라가면 봄이 옴을 절로 느끼지만 우리 선조들은 꽃의 피고 짐으로 그걸 알아차렸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풀꽃으로 ‘복수초’와 ‘노루귀’는 다 알리라. 특히 눈 속에 핀 복수초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봄의 전령사임을.
풀꽃 다음으로 나무에 피는 꽃으론 가장 먼저 피는 꽃이 생강나무꽃이다. 즉 노란 동백꽃이다. 이러면 당연히 반론이 나오리라. 우리가 다 아는 눈 속에 핀 동백꽃, 눈 속에 핀 매화(雪中梅)도 있는데 하며.
허나 조금 차이가 있다. 눈 속에 피는 동백꽃과 매화는 일반 동백과 매화와는 조금 다른 종자다. 대부분 한창 봄에 피어 늦은 봄까지 아니 초여름까지도 계속 핀다. 생강나무는 그 둘과 달리 이른봄에 잠깐 피었다가 이른봄에 다 진다. 피어 있는 기간이 아주 짧아 이 꽃을 보려면 마음먹고 찾아나서야 한다.
우리 집 뒷산에 생강나무가 참 많다. 그러니 생강나무꽃을 흔히 본다. 한때 아내가 꽃차 만들기에 빠져 따러 다닐 때 보조 일꾼으로 따라나선 적 있어 잘 안다. 생강나무의 잎 또는 가지를 꺾으면 생강 냄새가 나 생강나무라 부르며, 산동백(개동백)이라고도 한다. 소설 속에 ‘알싸한 향긋한 냄새’ 풍기는 바로 그 꽃이 생강나무꽃이다.
며칠 전 한창 추울 때 언덕 위에 올라서니 꽃망울을 머금고 있었다. 그 뒤로 따뜻한 날이 계속됐으니 지금쯤 애기꽃을 터뜨렸을지 모르겠다. 생강나무에 생강이 들어가 있으니 짐작하겠지만 예부터 약재로 쓰였다. 그러니 약과 연관된 전설도 전해진다.
중국 고대 삼황의 한 사람이며 농사와 의학의 시조로 우러름 받는 ‘신농씨(神農氏)’가 전설에 연관돼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 밋밋한 듯하여 따로 스토리텔링을 만들 필요를 느껴 대충 긁적거려 본다.
크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며 사냥을 하는 사냥꾼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라 작은 짐승을 노리지 않고 곰이나 호랑이 같은 큰 짐승만 잡으러 다녔다. 여러 날을 호랑이 흔적을 뒤쫓다가 어느 날 가까이서 들려오는 한 짐승의 비명을 듣고 부리나케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냥꾼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막 호랑이가 노루를 넘어뜨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광경. 그는 재빨리 활을 꺼내 겨누었다. 그러나 호랑이가 예사 동물인가. 이내 인기척을 느끼고 달아났다. 사냥꾼이 가까이 가보니 노루는 앞발에 채였는지 피흘리며 거의 다 죽어가는 상황.
눈앞에 그저 얻은 사냥감이지만 사냥꾼은 예로부터 재수 없다는 속설 때문에 노루를 취하지 않는다. 그냥 둬도 죽겠다 싶어 돌아서는데 그 노루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한 발 두 발 떼며 나아가는 게 아닌가.
‘저 녀석이 왜 저러나’ 하는 마음으로 보니 옆에 있는 노란꽃이 핀 나무까지 겨우 와선 잎을 먹고 조금 힘 얻으니 가지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저 녀석이 너무 아파 빨리 목숨 끊으려고 저러나.’ 하는데 이상하게도 잎과 가지 껍질을 씹어먹던 노루가 생기가 돌더니 부리나케 달아나는 게 아닌가.
‘참 신기한 일도 다 있네’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사냥에 나섰다. 며칠을 호랑이 흔적을 찾아 헤매다 마침내 녀석의 방금 싼 듯한 배설물을 발견하고는 호흡을 멈추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사냥꾼의 추측과 달리 앞쪽으로 간 게 아니라 바로 바위 위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그것도 모르고 앞을 향해 슬금슬금 접근하다 뒤에서 뭔가 덮치는 듯한 움직임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날렸다.
허나 호랑이는 이미 덮쳤고 자기는 절벽에서 떨어졌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랑이에게선 벗어났으나 정신을 잃은 상태.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으나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 절망뿐인 그때 그의 눈에 며칠 전 노루가 씹던 노란 꽃이 핀 나무가 보였다.
마지막 힘을 모아 기다가 나무에 다다라 잎과 나뭇가지 껍질을 씹자 이상하게도 통증이 가시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상은 생강나무가 가진 효능을 좀 과장해 스토리텔링해 보았다.
그 당시에 생강나무는 죽어가는 사람을 되살리는 효능을 지닌 약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공자는 [논어]에서 ‘불철강식(不撤姜食, 고대에 ‘姜’은 ‘薑’과 같음)’이란 말을 했으니까. 이는 ‘식사 때 반드시 생강을 잊지 말고 먹어라’란 뜻이다.
공자 시절에는 현재 우리가 먹는 생강과는 다르지만 생강나무 잎과 가지 껍질을 이용해 만든 생강을 음식에도 넣고 어혈 등 혈액순환이 필요할 때 먹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도 그 효험이 전해져 산 곳곳에 생강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그 때문인가 이 산 저 산에 가도 아주 흔히 보인다.
생강나무꽃이 피고 보름쯤 뒤에는 산수유꽃이 피는데, 생강나무꽃과 산수유꽃은 무척 닮아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한다. 둘 다 비슷한 계절에 피는 데다 노란 꽃이니까. 늘 보는 사람이야 금방 알지만 쉽게 접하지 못한 사람은 좀 구별하기 어렵다.
요즘엔 생강나무보다 산수유가 더 인기 많아 주택에도 심고, 가로수로도 심고, 온마을에 다 심기도 한다. (구례 산수유마을 참고) 아마 열매 때문이리라. 산수유가 한약재로 돈이 되고 또 빨간 열매가 관상용으로도 보기 좋으니까.
그래도 나는 생강나무꽃이 더 좋다. 산수유야 가까이에서도 볼 수 있지만 생강나무는 꼭 야산에 올라야 얼굴 내미니까.
*. 생강나무에 얽혀 전해오는 이야기는 모두 치유와 관련있습니다. 그런 점을 참고하여 스토리텔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pixabay의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