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편 : 이경림 시인의 '근대'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경림 시인 편 ♡
- 근대 -
허리가 활처럼 휘고 눈이 한쪽 찌그러진
녹슨 청동 부조 같은 할머니가 근대밭에서
--이봐, 근대 알어 근대? 된장 풀어 국 끓이면 맛있어 근대... 무쳐 먹어도 맛있고
--할머니, 근대… 꼭 시금치 같네요
--아녀 시금치보다 질쭉허구 억세지 더 넙적허기도 허구
비닐하우스 속에 4열 종대로
근대사(近代史)의 무슨 행군처럼 싯푸르게 서 있는
근대… 속에 머리를 박은 할머니,
--이것들, 햇빛을 못 보니께 더 싯푸른거 같어
--햇빛 본 놈들보다 힘은 읍지 뭐 맛도 덜 허구…
--근대… 뭣이든 비바람 맞어야 제 맛이 나는디
수세기 녹슨 청동의 손이
근대의 대가리를 썩뚝
썩뚝! 자르며
-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2011년)
<함께 나누기>
아마도 주부들 말고 남정네들은 시금치는 다 아시겠지만 근대나 아욱 같은 남새(채소)를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달내마을로 와 텃밭에 심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라니로 하여 더욱 잘 알게 되었고.
근대나 아욱을 심어놓으면 환장하고 뜯어먹으니까요. 이상하게도 함께 있는 다른 남새는 건드리지 않으나 그 둘은 뿌리 보일 때까지 뜯어먹습니다. 고라니가 가장 좋아하는 남새란 말은 근대나 아욱이 그만큼 그들 입맛에 맞다는 뜻이겠지요.
화자는 비닐하우스 곁을 지나다 나물(근대)을 자르는 할머니를 보고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할머니의 외형은 아래와 같습니다.
"허리가 활처럼 휘고 눈이 한쪽 찌그러진 / 녹슨 청동 부조 같은 할머니"
'허리가 활처럼 휘고 한쪽 눈이 찌그러진'은 외형상으로 매우 나이 들었다는 통상적인 뜻으로 봅니다. 거기에 '녹슨 청동 부조 같은'이 들어가 얼굴빛이 원래의 빛을 잃고 거무죽죽하게 변했다는 뜻으로 보아 그만큼 고생 많이 했다는 암시겠지요.
"비닐하우스 속에 4열 종대로 / 근대사(近代史)의 무슨 행군처럼 싯푸르게 서 있는 / 근대… 속에 머리를 박은 할머니"
언어유희(말장난)가 나옵니다. 발음만 같을 뿐. 전혀 관계없는 근대사와 근대. 이렇게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의도는? ‘근대밭’에서 머리를 박고 일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화려한 근대화의 발전 뒤에서 여전히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리며 소외된 민중의 삶을 상징함인지...?
"--이것들, 햇빛을 못 보니께 더 싯푸른거 같어
--햇빛 본 놈들보다 힘은 읍지 뭐 맛도 덜 허구…
--근대… 뭣이든 비바람 맞어야 제 맛이 나는디"
시인은 할머니의 대사를 빌려 뭔가 말하고자 합니다. 비닐하우스 속에서 햇볕을 못 받고 자란 근대나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비시키려는 의도로. 할머니는 노동의 본질과 필요성을 압니다. 허나 현재의 우리 현실은 어떤지요. 힘든 일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수세기 녹슨 청동의 손이 / 근대의 대가리를 썩뚝 / 썩뚝! 자르며"
녹슨 청동의 손이 할머니의 손인데, 그 손으로 썩뚝 자른 것은 근대의 대가리(잎)만이 아닐지 모릅니다. 어쩌면 근대화 이후 나쁘게 자리한 편의주의나 물질만능주의를 자르고 싶었을지도.
#. 이경림 시인(1947년생) : 경북 문경 출신으로 1989년 [문학과비평] 통해 등단. 가톨릭의대 진학하여 의사의 꿈을 꾸다 적성에 대한 회의로 중퇴한 뒤 우여곡절 끝에 시를 쓰게 되었다 함.
(같은 이름의 시인이 한 명 더 있으니 혼동 마시길)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