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505)

제505편 : 허연 시인의 '시정잡배의 사랑'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허연 시인 편 ♡


- 시정잡배의 사랑 -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 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워낙 쉽게 무너지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한 번 딱 부르고 죽자.
- [내가 원하는 천사](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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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허연 시인의 시를 작년에 처음 배달했습니다. 이곳저곳 뒤적이다 우연히 손에 잡힌 시. 그래서 올렸습니다. 오늘 이 시도 마찬가집니다. ‘시정잡배’가 주는 거친, 초대받지 못할, 정상인과 상종 못할, 그리고 날것의 의미에 덜컥 손이 나갔습니다.
시정잡배에서 ‘시정(市井)’은 옛날 우물(井)이 있는 곳에 시장(市)이 형성되고, 거기에 사람이 모이다 보면 이권을 노리는 ‘부랑배(雜輩)’들이 들끓게 되는데 그들을 시정잡배라 했습니다. 그 말이 시대가 변하면서 빈둥빈둥 놀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점잖지 못한 무리로 바뀌었습니다.
허나 오늘 시에서는 시정잡배가 멋있는 사람으로 그려졌습니다. 영화 같은 데서 나쁜 남자 역할을 하는 인간이 간혹 멋있듯이.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 참 비유가 찰집니다. 그러니까 언제 끊어져 떨어질지 모르는 놈이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랑조차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지도 못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사연 많은 놈일 수밖에 없고.
건달(참 조폭을 두고 양아치라 하면 매우 화를 내니까 삼가시고 건달로 부르시길)도 사랑을 해야겠지요. 건달이라고 사랑 모르고 지날 수 없을 터. 다만 건달은 언제 다른 놈에게 칼 맞아 저 세상 갈지 모르니 깊은 사랑, 끝맺는 사랑은 불가능함을 알기에 녹슨 철제 계단에 매달린 놈처럼 대충 사랑하겠지만.

“소주 몇 병에 비 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시정잡배는 겉으로 보기엔 매우 거칠고 험악해서 굉장히 강한 인성을 지닌 것 같지만 실은 약하디 약한 감성의 소유자입니다. 눈물도 흘릴 줄 알지만 그걸 직접 보여주지 않고 슬쩍 뒤돌아서며 아무 일 없듯이 팔 한 번 드는 시늉이 눈물 닦는 행동임을 우린 알지요.

“워낙 쉽게 무너지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시정잡배는 무너질 때는 평범한 우리보다 더 쉽게 무너집니다. 다만 차이점은 무너지면서도 실실 웃을 수 있는. 시정잡배도 나름 도(道)를 얻습니다 그 도는 수도하는 종교인이나 참되게 사는 일반인이 얻는 도와 격이 다르겠지만.
철저한 위계서열, 상명하복, 조직 우선주의, 바닥에 사는 사람 건드리지 않기, 배신자는 끝까지 찾아 복수, 철저한 비밀주의... 이런 계율을 지키지 않는 놈을 양아치라 합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괴롭히거나 작은 이익을 위해 조직을 배반하는 놈들.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술국을 먹다 말고 울컥’ 떠오르는 얼굴. 다시 떠오르는 그 얼굴을 막을 수 없는 그들만의 사랑도 있습니다. 시정잡배라도 사랑이라는 문 앞에 서면 가슴 아린 연유가 있을 터. 물기 짙은 그들의 사무침이 울컥 치솟는 듯. 그래도 마지막은 웃음으로 마무리 짓는 사랑, 그게 우리가 멸시하는 시정잡배의 사랑입니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어디 조폭 영화나 드라마에서 들어본 대사 같지요. ‘잊어버리는 것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다’ 어쩌면 시정잡배이기에 드러내놓고 사랑을 할 수 없기에 더욱 아련함이 더 솟구쳐오를 듯. 사랑하지만 가슴 속에 가둬 둬야만 했던.

“마지막으로 십팔번 한 번 딱 부르고 죽자”

물기 짙은 시정잡배의 사무침이 폭발합니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한번 딱 부르고’ 죽자고. 왜 하필 '십팔번'이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십팔번 한 번 부르고 죽어버리겠다 하며 화자가 마치 술주정하듯 내뱉습니다.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점잖게 견뎌내기에는 요즘 현실이 너무 퍽퍽하고 버겁기만 할 때 크게 십팔번 한번 때리고 싶지 않습니까. 살며 배신도 당하고, 실연도 해보고, 넘봐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시정잡배가 되고 싶을 터. 십팔번 한번 때리고 삽시다. 누가 날더러 시정잡배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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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첫째는 영화 [친구], 둘째는 드라마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스틸컷인데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 허연 시인(1966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1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등단.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은 ‘문학 청소년’들의 교과서이자 경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매일경제] 기자로 시작하여 선임기자와 [매경출판] 대표를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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