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508)

제508편 : 이희섭 시인의 '칼의 맛'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희섭 시인 편 ♡


- 칼의 맛 -


음식 속으로 수많은 칼자국이 박힌다
칼자국은 혈관을 돌며 몸속에서
골격과 근육을 키워낸다
손과 얼굴, 사상도 만든다

나는 무수한 칼자국을 삼키며 자라왔다
어머니의 칼날이 유년의 배고픔을 씻어냈고
누나의 칼질이 사춘기 격정을 도려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나는 그녀의 도마 위에 오른 칼맛에 길들었다

오래도록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를 사육해 왔다
혀끝에 비릿한 칼내음
칼맛에 나는 오장육부를 베인다

잘리는 살점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없다면
단면으로 배어 들어가며 칼맛을
어찌 알겠는가
상처가 맛을 내는 것이다
- [스타카토](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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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주방장이 얼마나 요리를 맛나게 만드는가를 보려면 칼질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안다고 들었습니다. 주방장의 칼질을 통해 재료가 가진 풍미가 칼맛과 어우러져야만 최고의 요리가 만들어진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시에서도 칼질, 칼맛, 칼자국 등 좀 무시무시하고(?) 거친 용어들이 시의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물론 여기서 칼로 시작하는 시어는 실제의 뜻보다는 비유의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음식 속으로 수많은 칼자국이 박힌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자랐고, 홀로 살지 않는 한 결혼 뒤에는 아내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생활합니다. 음식에는 어머니와 아내 두 사람의 칼자국이 배었을 터. 결국 두 여인이 만들어낸 칼자국이 혈관을 돌며 골격과 근육, 손과 얼굴, 사상까지도 만듭니다.

"나는 무수한 칼자국을 삼키며 자라왔다"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할 때는 어머니의 칼날이 유년의 배고픔을 씻어냈고, 누나의 칼질이 사춘기 격정을 도려냈고, 결혼 후에는 아내의 도마 위에 오른 칼맛에 길들었습니다.

“누나의 칼질이 사춘기 격정을 도려냈다”

이 시구는 여러 해석 가능합니다만 무서운(?) 누나 셋에게서 매운 교육을 받으며 자란 저로서는, 화자의 모나고 거친 부분을 깎아내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든 희생적인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오래도록 칼자루를 쥔 사람들이 나를 사육해 왔다”

‘사육해 왔다’는 거칠고 부정적인 시어지만 속뜻은 전혀 아닙니다. 나를 사람 되게 만들고, 나를 원만한 대인관계를 갖도록 만들어줬습니다. 세 여인의 잔소리와 바가지는 가끔 혀끝에 비릿한 칼내음을 느끼게도 했지만 다 나를 위한 채찍질이었음을.
어릴 때는 어머니 입맛에 길들어져 아무리 비싼 음식점이라도 별 맛을 몰랐고, 지금은 아내 입맛에 길들어져 그 맛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사육당해옴이 맞나 봅니다. 그 칼자국에 사육당함이, 그 칼맛에 사육당함이 그 음식에 사육당함이.

“상처가 맛을 내는 것이다”

마지막 시행은 이 시에 화룡점정의 꽃을 피웁니다. 음식 속에 칼자국이 많이 박힐수록 맛이 있듯이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인간적이 된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하기야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삶의 맛을 안다는 말을 종종 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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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섭 시인(1960년생) :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2006년 [심상]을 통해 등단한 뒤 국세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한 뒤 세무사로 일함. 또한 아내 정용화는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딸 이혜미는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가족 모두가 시인인 시인 가족.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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