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509)

제509편 : 이문재 시인의 '봄날'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이문재 시인 편 ♡


- 봄날 -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 [지금 여기가 맨 앞](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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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제가 40년도 더 지난 첫 학교(여고) 근무할 때 일입니다. 교무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선생님이 조례 후 한 여학생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 학생은 교무실이 몹시 불편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고. 이어진 선생님 말씀,

“아니 정 선생님, 인마 결석계에 쓴 결석 사유 한번 읽어보세요.”
그 학생이 어제 결석함은 수업 들어가는지라 잘 알고 있던 터. 특히 국어에 열심이라 더욱더 잘 알았고.
호기심에 결석계를 들여다봤더니,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하도 한들한들하기에 마음의 갈등으로 인하여 결석하였음. ”
제가 그 선생님께 부탁하여 대신 상담해도 되겠느냐 하자 쾌히 그러마 하여 맡게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등굣길이 대략 삼십 분쯤 걸렸는데, 마침 가을이라 둑방에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모양입니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하늘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마음도 붕 떠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더랍니다. 그 순간은 학교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코스모스 핀 길을 따라 둑방을 한참 걸었답니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고. 그날 하루 그렇게 땡땡이쳤다는 게 그 소녀의 설명.
충분히 그러고 남을 소녀였습니다. 한번은 수업 시간에 눈물이 글썽글썽하기에 바라봤더니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지자 눈이슬이 떨어지던 모습을 직관했으니까요.

시로 들어갑니다.

대학 연구실에서 잠시 밖을 보던 화자의 눈에 철가방이 급브레이크 잡는 광경이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급히 잡았는지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으니까요. 화자는 뭔가 큰일이 났나 보다 하고 바라보는데 철가방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어댑니다.
세상에, 목련꽃이라니! 앞에 맨홀 뚜껑이 열린 것도 아니고 급히 지나는 학생도 보이지 않는데 고작 목련꽃 찍으려 급브레이크를 잡다니! 철가방이 배달할 종목은 짜장면이나 군만두나 탕수육뿐인데 백목련 사진 그리도 급히 배달하려 오토바이를 멈추다니…

철가방의 급브레이크 원인 제공은 백목련입니다. 아마도 당시 그 청년의 가슴에 담긴 신호등은 빨간색도 주황색도 초록색도 아닌 흰색이었을 겁니다. 백목련의 흰색 신호등이 보이는 순간 그 즉시 오토바이를 멈췄을 터. 철가방에게 이 흰색 신호등은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합니다.

“계란탕처럼 순한 / 봄날 이른 저녁이다”

철가방의 모습을 보고 봄날 이른 저녁에 먹는 계란탕처럼 순한 맛을 느낌은 오로지 시인의 역량입니다. 왜 뛰어난 시인인지 알 수 있을 터. ‘오토바이에서 내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찰칵거리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얼마나 이뻤을까요.
철가방은 남들 눈에는 그리 대단한 직업이 아닙니다. 힘들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 힘듦과 위험에 비해 수입이 얼만 안 되는. 그러나 시인의 눈에 든 순간만은 가장 으뜸 직업입니다. 경제적 이익도 남들의 눈도 의식 않고 오직 꽃이 환하게 웃는 그 모습에 빠지는 순수한 열정의 청년.

내가 가장 진실할 때는 언제일까요.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 때일 겁니다. 길을 걷다 절로 발길을 멈추게 만드는 그런 순간. 벚꽃도 영산홍도 복숭아꽃도 배꽃도 좋고, 수선화도 봄까치꽃도 냉이꽃도 애기똥풀꽃도 보일 때 잠시 발을 멈추는 그 순간만은 누구나 진실 속에 빠져듭니다.
이리 보면 봄은 수많은 미사여구가 필요한 게 아닌가 봅니다. 묵은 벗이 툭 던지는 ‘잘 있나?’ 한 마디처럼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고, 단순하지만 다정함이 배어 있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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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재 시인(1959년생) :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제1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사저널] 기자 [문학동네] 편집위원 거쳐 경희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임.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 ‘60+기후행동’ 대표, ‘오대산지구 시민작가포럼’ 대표 등을 맡아 '생태주의 시인'이란 별명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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