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511)

제511편 : 마종하 시인의 '겁'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마종하 시인 편 ♡


- 겁 -


비결은 '겁'이다.
겁으로 산 것이다.
빌어먹을 눈치 보기라니.
1·4 후퇴 때 어머니께서
바가지를 쥐여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소리 지르라고 하셨다.
"밥 좀 주세요!"라고.
나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께선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셨다.
그때부터, 뿌리의 겁,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
가난은 이제 친숙하다.
죄 없는 마음으로
기름 뺀 힘살만으로
저 널린 허무를 가꾸며,
마른 바가지와도 같이
겁마저 가볍게 꾸린다.
- [창작과비평](200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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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대학 졸업 후 첫 학교에 근무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서무실 - 행정실 -에서 내려와 보란 말을 들었습니다. 가보니 제 '민간인 신원진술서'가 오지 않아 교사 채용이 공식적으로 되지 않았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요. 그 당시 교사 채용 절차에 민간인 신원진술서가 꼭 필요하다고 하여 경찰서로 넘겼는데. 가보니 제 부모가 빨치산 부역자로 돼 있어 그랬다더군요.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알고 보니 우리 집뿐 아니라 지리산 아래 그 마을 사람들 모두 다 그랬다고.

낮에는 국방군,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곳. 그래서 그렇게 낙인찍혔다는데. 그런 사실을 몰랐던 저는 결국 6개월이나 늦게 채용돼 남들보다 손해를 봤지요. 그렇게나마 통과된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
문제는 울엄마에게서 터졌습니다. 제 얘기를 듣더니,
“아이고 마, 왜정 때도, 빨갱이 쳐들어왔을 때도, 전쟁이 끝나도, 순사들은 와 우릴 못 살게 구노!”

울엄마는 그 뒤에도 경찰을 무척 겁을 냈습니다. 파출소 앞을 절대 지나치지 않으려 하셨지요.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우리들에게,
“너거는 즈을대로 죄짓고 살면 안 된다. 순사한테 잡혀가면 큰일난다카이”
그 덕인지 울엄마는 보살할매란 말을 이웃으로부터 들으며 사셨지요. 그렇게 착하게 사셨는데… 치매 걸려 고생하던 중에 밖에서 벨이 울리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고 마, 순사가 우리 집 문 앞에 왔나 보데이. 즈을대로 문 열어주지 마라. 잡혀 간다 안 카나.”


어떤 일이나 대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겁(怯)’입니다. ‘겁이 나 죽겠다’처럼. 오늘 작품은 아마도 화자(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인 듯. 특히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텨야 했던 1․4후퇴 때의 일로 보입니다.
어머니는 어린 화자더러 바가지를 쥐어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밥 좀 주세요!”라고 소리를 지르라고 하십니다. 흙담에 몸을 가리라고 한 까닭을 유추해 봅니다. 당신 아들이 부끄러움 많아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키려 한 꾀 아니었겠느냐는 짐작.
화자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셨습니다.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할 가난이란 가시밭 앞에선 부끄러움도 체면도 다 버려야 한다고 어머닌 생각하셨던가 봅니다.

“그때부터, 뿌리의 겁, /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 / 가난은 이제 친숙하다”

‘가난은 걸친 옷처럼 친숙하다’라는 말을 흔히 씁니다. 가난이 일상생활에 너무나 깊숙이 스며들어, 마치 몸에 익은 헌 옷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분이 돼 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가난은 삶에 방해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이 박여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일어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가난은 조금 불편하거나 느릴 뿐 내 삶의 모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죄 없는 마음으로 / 기름 뺀 힘살만으로 / 저 널린 허무를 가꾸며”

가난해도 남의 것을 탐하려는 의도나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내뱉는 대신 순수한 마음으로, 불필요한 욕심, 겉치레, 거품(기름)을 모두 제거하고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가난으로 인해 허무감을 느낄지라도 불평하는 대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거나 묵묵히 그 상황을 견디며 살아가렵니다.

“마른 바가지와도 같이 / 겁마저 가볍게 꾸린다”

물이 담긴 바가지는 무거워도 마른 바가지는 가볍습니다. 그것처럼 삶의 고단함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무겁게 여기지 않고 덤덤하게, 가볍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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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종하 시인(1943년 ~ 2009년) : 1968년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두 군데 동시에 당선되는 바람에 신춘문예 중복투고 금지를 낳게 한 장본인.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36년간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고, 모든 문학상을 거부했으며, 특히 「딸을 위한 시」가 유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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